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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

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시궁창이라구 : 이응준 <국가의 사생활>

by Keaton Kim 2020. 6. 15.

 

 

 

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시궁창이라구 : 이응준 <국가의 사생활> 

 

 

 

유럽을 여행할 때 주로 기차를 이용했다. DB라는 독일 기차앱과 SBB라는 스위스 기차앱을 사용했는데 출발지와 도착지를 입력하면 연결편이 자동으로 쭉 나온다. 예를 들면 스위스 몽트뢰 출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도착으로 찍으면 로잔, 베른, 프랑크푸르트에서 갈아타고 총 12시간 37분이 걸린다고 나온다. 무지 편하다. 가끔 기차가 연착해서 탈이지만.

 

 

 

이걸 이용하다가 혹시나 하고 도착지를 평양으로 입력해봤다. 그랬더니..... 우왓! 결과가 나온다. '베를린 ~ 바르샤바', '바르샤바 ~ 모스크바', '모스크바 ~ 우수리스크', '우수리스크 ~ 평양'으로 나온다. 순수하게 기차를 타는 시간만 98시간 걸린다고. 하, 신기하다. 이 앱 대단한 걸. 근데, 가능하구나. 평양까지 기차로 평양까지 갈 수 있구나. 그럼 부산까지도 가능하겠구나, 통일만 된다면.  

 

 

 

우리나라 머리 위의 저 장벽만 없다면 우리집에서 출발해서 평양에 내려 여행을 하다 중국,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자주 하곤 했더랬다. 얼마나 좋을까. 죽기 전에 꼭 해봐야지 하고 결심을 다지기도 했다. 그런데, 통일된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 소설의 배경은 통일 한국이다. 2010년에 엉겁결에 남한이 북한을 흡수통일했고, 이후에 온갖 삽질을 한다. 그래서 나라는 막장 중의 막장이 되고 사람들의 삶은 완전 시궁창이다. 이런 모습은 한번도 상상한 적이 없다. 그래서 충격적이었다.

 

 

 

통일 대한민국에서 총기는 도난 차량보다도 구하기가 쉬웠다. 2014년 가을에는 안양의 한 사립고등학교 양호 선생이 자기를 3년 가까이 성폭해해 오던 교감의 머리통에 구소련제 토가레프로 수도관만 한 구멍을 내 버리는 바람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하물며 부패 형사와 인민군 출신 조직폭력배 사이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경찰들은 문방구에서 파는 장난감 총만 봐도 엉겹결에 총을 뽑아 드는 히스테리성 노이로제에 시달렸다. 모두가 청천벽력같이 찾아든 평화통일의 대혼란 속에서 공화국 군대의 무기 회수와 그 관리가 허술했던 탓이다. 그리고 그것은 2011년 5월 9일 오후 4시경 한반도에서 난데없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며 튀어나온 수천의 마귀들 중 고작 한 마리에 불과했다. (p.22)

 

 

 

북조선 남자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10년 가량의 혹독한 군 복무 기간 동안 휴가가 없었다. 한 한 번, 말년에 휴가가 14일 정도 있기는 했으나 못 찾아 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열일곱 살 즈음에 집을 떠나 서른 살 무렵까지 전투 기계가 되어 고향에 못 돌아가니 가족의 정을 느낀다는 것도 요원했다. 진짜로 여자 손목 제대로 못잡아 본 남자들이 수두룩했다. 이런 사내들에게 축적된 스트레스와 폭력성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에 관한 데이터가 통일 정부에는 전혀 없었다. 이북 남자들이 강간 사건을 많이 일으키는 것은 그들이 짐승이어서가 아니라 성에 무지하기 때문이었다. (p.96)

 

  

 

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서 경찰들이 과잉 대응으로 총을 쏘기도 하고(이건 완전 천조국인데....), 북에서 내려온 오갈 데 없는 전직 군인들로 인해 강간의 왕국이 되고, 최상류층이었던 북한의 아나운서가 남한에서 청소부로 일하다가 자살하며, 북에서 내려온 소녀는 공장 사장에게 강간을 당해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북한의 아가씨는 남쪽 룸싸롱에서 가장 인기있는 아이템이 된다. 국가는 개인을 구제할 능력이 없다. 

 

 

 

이게 저자가 묘사한 통일 한국의 모습이다. 진짜 적나라하다. 이쯤되면 지옥도 이런 지옥이 따로 없다. 완전 아수라판이다. 근데 이게 설마! 하다가도 점점 수긍이 된다. 이렇게 안된다는 보장이 없다. 갑자기 등골이 시려왔다. 

 

 

 

 

 

 

21세기의 한국 작가가 상상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센 이야기를 가장 위험한 칼끝으로 점묘해 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p.259 작가의 말 중에서)

 

 

 

작가는 아얘 작정을 하고 이 소설을 썼다. "야, 통일은 대박이라구? 웃기는 소리 말라구 그래. 통일은 시궁창이야!" 이렇게 외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밑바닥을 쓸고 닦는 사람들, 그니까 외국인 근로자나 인생 막장의 사람들이 통일된 나라에서는 북한 사람들로 대체된다. 그런 설정이다. 그러고보니 통일 이후의 모습을 그린 소설은 본 적이 없다. 영화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통일이 되고 난 이후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뭔가 꺼림칙하다는 말인가?      

 

 

 

넌 통일 이후의 대한민국이 우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 천만에. 그건 이남 사람들의 착각일 뿐이야. 여긴 원래 이랬어. 그게 통일 때문에 극심해져서 확연히 드러난 것뿐이지. (p.183)

 

 

 

그래, 맞다. 통일 이후의 북한 사람은 우리의 거울이다. 책 속에 나온 상황을 곱씹어보면 서로가 너무 모르는 상태에서 통일을 한 것이 가장 큰 패착이다. 서로 준비가 되지 않았다. 통일은 벼락같이 올 수 있다. 독일도 그렇게 통일이 되었다. 지금 남과 북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한민족이라는 가슴의 뜨거움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북한 사람들은 뭘 즐겨 먹고, 뭘 입고, 출근은 어떻게 하는지, 일주일에 며칠 쉬는지, 쉬는 날에는 뭐하고 노는지. 그들에게 뭐가 제일 필요한지. 서로에게 필요한 건 뭔지. 국가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이런 거 배워야 한다. 나라에서도 가르쳐야 한다. 남과 북이 뭐가 같고 뭐가 다른지.

 

 

 

통일은 블루오션이라 생각했다. 기차로 북한에 가는 상상만 했다. 작가는 내 뒤통수를 강하게 쳤다. 준비되지 않는 통일은 디스토피아라고 말한다. 오랜만에 도끼같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