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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이야기

우리나라 철학자 조상님들이 이렇게나 매력적이었다니.... : 전호근 <한국철학사>

by Keaton Kim 2021. 6. 8.

 

1. 사회주의적 분배 방식

 

차병직의 <상식의 힘>이라는 책을 보면 어떤 한국인이 헝가리에 갔다가 거기서 사회주의적 분배 방식이 어떤 건지 깨달았다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과 장수 할머니가 사과를 팔고 있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과를 사 가는데 그 할머니가 하나는 좋은 것, 하나는 나쁜 것 이런 식으로 섞어서 팔아요. 한국 사람이 할머니에게 "돈을 더 줄테니 좋은 것만 달라"고 했더니 할머니가 "너한테는 안팔아" 했답니다. 왜 그 사람들은 그렇게 살까요? 어리석어서? 왜 한국 사람은 모두 좋은 것만을 원할까요?

 

다 나름의 입장이 있죠. 할머니 얘기는, 먼저 온 사람이 좋은 것 다 가져가면 뒤에 온 사람은 뭘 가지고 가느냐는 거고, 한국 사람은 아침에 부지런히 일어났으니까 좋은 걸 가져갈 자격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죠. 그러니까 한국인은 잠을 편안하게 못잡니다. 먼저 일어나서 좋은 사과를 차지해야 하니까 피곤하게 삽니다. 평생 죽어라 일만 하면서 사는 거예요. 늦게 오는 사람은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죠. 정의로운 사회가 맞나요? (p.27 원효 편)

 

 

2. 조강지처

 

아무튼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강수는 대장간 집 딸과 만사서 서로 사랑이 독실했는데 스무 살이 되자 강수의 부모가 고을의 여인 중에 용모와 행실이 반듯한 자를 중매해서 새 아내로 삼게 하려 합니다. 그런데 강수가 두 번 결혼할 수 없다고 사양합니다. 이것은 유교적 관점에 부합하는 처신입니다. '조강지처'란 어려운 시절에 술지게미나 겨(糟糠) 따위로 남편을 뒷바라지한 아내, 곧 가난한 시절을 함께한 아내를 뜻합니다. 이런 아내는 집에서 쫓아내면 안되고 가난한 시절의 친구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바로 '조강지처 불하당 빈천지교 불가망'입니다.

 

흔히 유가에서 여성의 정절을 강요했다고들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경우에서 보듯 유가에서 정절은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지키는 사람은 많지는 않았습니다만..... 물론 '한 남편을 섬긴다'는 일부종사 같은 조목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구속하기 위해 만든 이데올로기입니다. (p.89 강수 편)

 

 

3. 중생의 본성은 부처와 다를 바 없다

 

지눌은 시호가 불일보조佛日普照입니다. 흔히 보조국사 지눌이라고 하죠. 보조는 '온 누리를 비추다', 불일은 '부처의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깨달음의 빛이 온 누리를 비춘다는 뜻이죠.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눌은 한국 선문의 실질적인 개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핵심은 '중생의 본성은 부처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굳이 중생이 인도로 가지 않아도 되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경전을 통해 읽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성이 같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선禪의 종지宗旨입니다. 본성을 어떻게 드러내고 어떻게 자성自性을 깨닫고 수양을 통해 그것을 어떻게 유지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선의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려면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p.145 지눌 편)

 

 

4. 돈오점수

 

앞에서 말했듯이 돈오頓悟는 단번에 깨치는 것을 뜻합니다. 이른바 성리학에서도 단번에 깨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일조활연관통'이라고, 어느 날 갑자기(활연히) 관통하는 하는 겁니다. 그런 예는 많습니다. 운동의 기술을 익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구공을 칠 때 처음에는 공이 안 보이다가 연습하다 보면 보이는 순간이 있죠. 피아노 연주도 그렇습니다. 왼손, 오른손 따로 치다가 어느 순간 자유자재로 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게 활연관통입니다. 성리학에서의 수행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돈오란 이런 수행 없이도 가능하다는 거죠. 돈오와 상반되는 점수漸修는 조금씩 닦아 나가는 것이죠. 유가에서의 수행은 점수밖에 없습니다. 범인凡人도 수양을 하면 성인이 될 수 있고 성인도 수양을 하지 않으면 타락합니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수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양론이 힘을 얻습니다. (p.161 지눌 편)

 

 

5. 진정한 은자

 

은자에는 여러가지 유형이 있어요. 원래 은둔은 간단합니다. 사람이 없는 데로 가는 겁니다. 멀리 있는 산속에 들어가 숨는 게 은둔입니다. 가 버리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니까 외롭죠. ...... 저잣거리에 숨네, 땅에서 물에 잠기네 별소리 다 하지만 은둔하지 않으면서 은자의 풍모를 흉내 내고 싶어 하는 가짜들입니다. 진짜 은자라면 최치원처럼 한 번 산에 들어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않아야 합니다.

 

요즘도 은둔한답시고 시골 가서 농사짓다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니까 외로워서 다시 돌아오는 가짜 은자들이 있습니다. 정신은 욕망의 도시에 있고 몸은 한적한 시골어 봤자 외로움만 커지니 가짜 노릇 안 하는 게 좋죠. 모두 익보에 걸리면 신랄하게 비웃음을 당할 겁니다. 이규보가 강좌칠현을 보는 시선도 그랬습니다. 그런 가짜 은자들의 내심을 이규보가 예리하게 찌르니까 결국 그 사람들과 관계가 안 좋아지고 미치광이 소리를 듣게 됩니다. (p.170 이규보 편)

 

 

6. 척안과 붕새

 

척안은 소택지에 사는 작은 메추라기입니다. 대붕도 척안도 <장자>에 나옵니다. <장자>에 보면, 붕새가 구만 리 장천을 솟아올라 남쪽으로 날아가니까 척안이 그걸 보고 저놈 이상하다, 하고 비웃습니다. "우리는 날아 봤자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로 옮겨 가고 때로는 거기도 못 가 땅에 떨어지고 말지만, 하여튼 이것도 나는 것이다. 그런데 저놈은 대관절 무엇 때문에 저렇게 놓이 난단 말이냐?" 하고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붕새인 줄 알고 도취했다가는 이렇게 장자에게 한 방 맞습니다. (p.178 이규보 편)

 

 

7. 광풍제월

 

'광풍제월光風霽月'에서 '광풍'은 맑은 바람이라는 뜻이고 '제월'은 비갠 뒤 밝게 빛나는 달을 뜻합니다. 본래 '광풍제월'은 주돈이의 인품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주돈이는 송학의 개조라 할 수 있는 성리학자로 <애련설>, <통서>, <태극도설>을 지었습니다.

 

주돈이의 인품을 '광풍제월'로 비유한 사람은 북송의 시인 황정견인데 광풍제월은 마음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표현한 말로 청렴한 삶을 뜻합니다. 요즘 같은 자본주의 시대에 청렴한 사람은 도리어 무능하고 한심한 사람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죠. 지금 안자나 주돈이 같은 사람이 있다면 다들 혀를 끌끌 찰 겁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들은 이런 삶을 동경했습니다. 예컨대 담양에 가면 양산보가 은거했던 소쇄원이 있습니다. 양산보는 조광조의 제자였는데 1519년 기묘사화로 스승이 희생되자 고향에 내려가 소쇄원을 지었습니다. 소쇄원 안에 광풍각과 제월당이란 건물이 있는데 이 두 건물의 방은 딱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너비입니다. 세간이 들어갈 공간이 없어요. 공간 자체가 그러하니 정말 맑게 살 수밖에 없겠죠. 이 또한 주돈이의 정신세계를 반영한 것입니다. (p.231 이제현 편)

 

 

8. 성리학은 실천이다

 

성리학은 본디 이론보다 실천을 더 중시하는 학문이죠. 그런 정신이 고려 말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전체를 관통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남명 조식 같은 대유학자도 "이론은 정주리학에서 다 밝혀 놓은 것이고 이제 선비들에게 남은 것은 실천이다. 실천궁행이 올바른 선비의 모습이다"라고 얘기했어요.

 

남명은 퇴계와 고봉이 8년 동안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펼진 사단칠정 논쟁을 긍정적으로만 보지 않았어요. 급기야 이황에게 그만하라고 권합니다. 그런 식으로 이론에 천착하는 것은 선비에게 칭찬받을 만한 일은 아니라고 했어요. 이것도 실천궁행을 더 중요하게 여긴 성리학이니까 가능했던 이야기입니다. (p.243 정몽주 편)

 

 

9. 문자의 나라 조선

 

한나라를 비롯해 유가의 왕도 이념을 가장 분명하게 내세우고 그에 걸맞은 정책을 가장 오랫동안 추진했던 나라를 들라고 하면, 그게 바로 '조선'이라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문의 나라라고 할 때, 문은 '문자'를 뜻하죠. 그렇다면 문자의 양이 어느 정도 되느냐를 따져 봐야겠죠.

 

조선은 문자에 모든 걸 걸었던 나라입니다. 군대를 양성해서 목숨 걸고 쌍자, 이게 아니고 문자에 목숨을 건 겁니다. <조선왕조실록>의 문자량은 거의 5,000만 자에 달합니다. 중국 25사(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인 25개 사서를 통칭하여 일컫는 말)를 다 합해도 3,000만자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나 <일성록>은 <조선왕조실록>을 만들기 위한 사초 사료인데, 지금 남아 있는 <승정원일기>의 문자량이 3,242책, 2억 4,250만 자에 달합니다. 단일 기록물로는 세계 최다 분량입니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둘 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죠. 그 밖에 <훈민정음>, <조선왕조의궤>, <동의보감>까지 모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조선이 문자의 양에서 압도적인 나라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문헌을 모두 합하면 당할 수 없지만,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려하면 문자량에서 대적할 만한 나라가 없다고 해야 할 겁니다.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요. (p.283 조선 시대 철학 편)

 

 

10. 임금은 현자들의 말을 듣는 사람

 

'개언로開言路'는 언로를 열라는 의미입니다. 맹자가 제나라 선왕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임금에게 옥이 있다, 그럼 누구에게 옥을 다듬게 할 거냐, 임금이 직접 다듬을 것이냐, 아니면 옥을 다루는 전문가에게 맡길 것이냐, 임금은 전문가에게 맡긴다고 대답하죠. 그러자 맹자가 다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임금에게 나라가 있다, 그럼 나라를 누구에게 다스리게 할 거냐, 옥을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처럼 현자에게 맡겨야 하는데 임금이 직접 다스리려고 하니, 이는 나라를 옥보다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라고 하죠.

 

맹자의 이야기는 임금이 현자의 말을 듣고 나라를 다스리면 왕도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임금이 꼭 현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임금은 자신의 현명함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 현자들의 말을 듣는 사람인데, 그렇게 하려면 언로가 열려야 합니다. 임금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시대에 언로가 열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겠죠. (p.290 정도전 편)

 

 

11. 조광조와 이이

 

성리학은 조정암(조광조)에서 처음 일어나 퇴도(이황) 선생에 이르러 이미 유자의 면모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퇴도는 성현의 언어를 그대로 따라 실천한 이로 독창적인 견해가 보이지 않는다. 화담의 경우 독창적인 견해는 있지만 다 보지는 못하고 한 모퉁이만 보았다. - 율곡전서 어록 상 -

 

이처럼 이이는 도학, 곧 성리학이 비로소 조광조에게서 시작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퇴계는 독창적인 견해가 별로 없고 화담 서경덕의 경우 이론의 독창성은 있으나 일부만 그렇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럼 누가 다 봤다는 걸까요? 이이 자신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이가 다 보았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고 할 만합니다. 이이는 심성론과 이기론을 성공적으로 결합했다는 점에서 조선 성리학의 완성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이 이후에는 성리학이 고착되어 독창적인 사유가 막히고 지배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강화됩니다. (p.308 조광조 편)

 

 

12. 퇴계의 바늘과 카프카의 도끼

 

내가 몇 달 동안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주자의 글을 한 번씩 보았다. 그 말 중에 간절하고 통렬하여 읽는 사람에게 절실하게 도움이 되는 부분을 만날 때마다 세 번 반복해서 살피고 읽어 보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마치 바늘이 내 몸을 찌르는 것 같았고 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 퇴계집, 정자중에게 보내는 편지 -

 

이황이 주자의 글을 어떻게 대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실 독서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글을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겠죠. 바늘로 찌른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롤랑 바르트 같은 사람은 사진을 이야기할 때 푼크툼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푼크툼은 사진을 볼 때 화살을 맞은 듯한 전율을 느끼는 것인데 이황은 주자의 글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나 봅니다. 또 글을 읽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나는 느낌은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p.389 이황 편)

 

 

13. 학문은 일상을 떠나지 않는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이 아니면 사람이 될 수 없다.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또한 이상하거나 별도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단지 어버이가 되어서는 마땅히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되어서는 마땅히 어버이를 사랑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마땅히 임금을 정성으로 모시고, 부부가 되어서는 마땅히 서로 구별하고, 형제간에는 마땅히 서로 우애하고, 어린 사람이 되어서는 마땅히 어른을 공경할 것이고, 벗들 간에는 마땅히 신의로써 사귀어야 한다. - 격몽요걸 격몽요결서 -

 

격몽요결 서문에서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학문이 아니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도기 위한 방법,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학문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냐? 간단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군신 간에, 형제 간에, 붕우 간에 마땅한 도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모두 일상을 떠나지 않습니다. (p.407 이이 편)

 

 

14. 남명은 사람에게 정신과 기개를 가르쳤다.

 

상이 김우옹에게 하문하기를, "조식은 사람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하니, 김우옹이 아뢰기를, "조식의 박문博文, 궁리窮理는 이황만 못하지만 사람에게 정신과 기개를 가르쳤으로므로 흥기된 자가 많았는데, 최경영, 정인홍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였다. - 선조실록, 조식에 대해 논함 -

 

조식의 문하에서는 50명이 넘는 의병장이 배출되었습니다. 의령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 합천의 정인홍, 고령의 김면, 황석산성 전투에서 순국한 함양 군수 조종도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어요. 제자의 제자를 합치면 수백 명에 달합니다. 조식이 산천재에서 품었던 양강의 군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겠습니다. 조선의 사대부가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의병으로 활동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p.452 조식 편)

 

 

15. 고통받는 백성들과 함께 살리라

 

유형원의 경우에는 생산 수단인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에 조건의 평등을 이야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산 조건을 동일하게 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게 하는 방식입니다. 조건이 같다면 부지런히 농사를 지은 사람은 소출이 많겠고 게을리 한 사람은 소출이 적겠지만 그 결과는 개인의 노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중략) 어쨌든 인류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생산수단을 골고루 분배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맹자 때부터 그런 사유를 했고, 그 이후 많은 사람이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장기간 성공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인간의 능력이나 욕망에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유형원이 제시한 개력안은 윤증이나 이익 같은 학자나 영조아 정조 같은 임금이 보기에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정조는 "100년 전에 마치 오늘의 역사를 본 것처럼 논설했다"라고 하면서 유형원은 100년을 앞서간 사상가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p.471 유형원 편)

 

 

16. 정제두, 신분제의 개혁을 외치다

 

정제두는 지주제를 없애고 균전제를 시행해야 하며, 양천제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신분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굉장히 획기적인 견해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정유재란,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이미 조선은 기존의 성리학적 질서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지경으로 신분질서가 동요된 상태였습니다. 신분제를 개혁하자는 정제두의 주장은 당시 조선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 조선은 근본적으로 농본 국가였기에 유형원, 이익, 정약용 모두가 토지 제도를 잘 정비하고 수탈 구조를 없애기만 하면 나라가 잘 운영되리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그런 개혁이 불가능했을뿐더러 이미 욕망의 크기가 달라진 상태여서 토지 제도를 개선하고 수탈 구조를 억제한다고 개혁이 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수탈을 없애는 것은 민생의 안정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지만, 신분 질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했습니다. 정약용은 1818년에 <목민심서>를 완성하고 183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1862년에 진주민란이 일어났으니 그사이에 수탈 구조가 전혀 개선되지 않았던 셈입니다. (p.497 정제두 편)

 

 

17. 연암,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다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중상중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업은 직접 노동을 해서 작물을 생산하고, 상업은 생산해 놓은 작물이나 상품을 유통하면서 이익을 추구하죠. 욕망을 덧붙여서 사고팔고 소비하는 겁니다. 이익이나 정약용 입방에서 보면 그런 욕망은 마땅히 배제되어야 할 사리사욕입니다. 반면 연암을 비롯한 북학파 지식인의 경제 관념은 그런 욕망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욕망을 바라보는 태도가 다르지요.

 

글 내용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연암의 자유로운 정신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아무리 사소하고 하찮다 해도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태도가 연암의 글 속에 가득합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연암의 시각에서 보면 다산의 글이 고리타분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다산은 시란 모름지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훈적이죠. 그래서 좀 답답합니다. 노래로 비유하자면 건전가요라 할 수 있는데, 물론 다산은 그런 시를 기막히게 잘 쓴 사람입니다. 어쨌든 연암을 자유롭게 글을 쓰는 스타일이고 다산은 형식을 엄정하게 갖추는 스타일이죠. (p.558 박지원 편)

 

 

18. 열녀라는 제도는 천하의 악습

 

다산은 <열부론>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임금이 병으로 죽었는데 신하가 따라 죽으면 충신인가? 당연히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하들이 다 따라 죽어야 할 테죠. 그러면 나라가 망합니다. 이어서 이렇게 묻습니다. 어버이가 병으로 죽었는데 자식이 따라 죽으면 효자인가? 역시 아닐 수밖에요. 그러면 인류가 멸망하겠죠.

 

그러고는 마지막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남편이 병으로 죽었는데 아내가 왜 따라 죽느냐? 열녀는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논리를 제기하는 방식부터 이렇게 다릅니다. 이처럼 다산은 열녀라는 제도를 천하의 악습으로 명백하게 판정합니다. (p.608 정약용 편)

 

 

19. 한국 철학사상 최초의 근대적 사유

 

(동학은) 특히 누구나 천주를 모시면 군자가 될 수 있다는 평등 의식은 봉건적 신분 질서를 크게 동요시켰는 점에서 반봉건 사상으로 규정할 수 있고, 외세의 개입에 반대하는 반외세 정신은 근대적 자주성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한국 철학사상 최초의 근대적 사유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중략) 동학은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지만 당시 조선의 지배층들은 봉건적 신분 질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해 끝내 동학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겁니다. 예컨대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과 동학 교도들이 협상하는 자리에서, 관리들이 동학을 대표하는 접주들만 마루 위로 올라오게 하고 나머지는 마당에 앉게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러니 말이 통할 리가 없습니다. 결국 당시 조선의 엘리트들이 동학이라는 새로운 사유를 수용하거나 이해할 만한 자질이 안 되어서 기회를 놓쳐 버린 셈입니다. 자주적인 노력으로, 꼭 근대는 아니더라도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겁니다. (p.677 최제우 편)

 

 

20.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함석헌 하면 우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떠오릅니다. 좁게는 자유당 독재를 비판한 글이지만, 실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겪고도 반성하지 않는 한국인 모두를 향한 외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겪고서도 평화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외침은 언제까지나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p.769 함석헌 편)

 

 

21. 포도원 비유

 

포도원 비유는 제가 1장에서 말씀드린 바 있는데, <마태복음>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 즁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불하는데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 낮에 온 사람, 오후에 와서 일한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1데나리온을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를 대학생들에게 들려주었더니 대부분이 먼저 온 사람이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포도원 주인의 처사가 공정치 못하다고 해요. 또 그런 식이라면 아무도 일찍 와서 일하려 들지 않을 테고 결국 포도원이 망할 거라고 하더군요. 기독교 신자도 많았어요. 그럼 나사렛 예수가 공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학생들은 모두 포도원을 경영학의 관점으로 바라본 것 같아요. 경영은 효율을 위한 것이고 일꾼들을 착취할수록 효율이 높아지겠죠. 경쟁을 부추기는 것보다 좋은 착취 방법이 없잖아요? 학생들은 나중에 자신이 포도원 주인과 일꾼 중에 어느 쪽이 될 가능성이 큰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부분 일꾼이 될 텐데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착취당할 준비가 잘되어 있는 일꾼이 되겠죠. 물론 착취 잘하는 주인이 된다면 더 끔찍한 세상이 될 겁니다. (p.794 함석헌 편)

 

 

22. 군고구마 장수의 큰 기술

 

무위당 장일순을 처음 알게 된 건 돌아가신 지 10여 년이 지난 뒤의 일로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된 <좁쌀 한 알 장일순>을 통해서였다. 거기에 실린 글에서 무위당은 군고구마 장수의 큰 기술(大巧)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추운 겨울날 저잣거리에서 군고무를 파는 사람이 써 붙인 서툴지만 정성이 가득한 군고구마라는 글씨를 보게 되잖아. 그게 진짜야. 그 절박함에 비하면 내 글씨는 장난이지. 못미쳐.

 

이 글과 함께 앞쪽에는 '백교백성 불여일졸(百巧百成 不如一拙)'이라는 글이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백 가지 재주와 성공이 한 가지 졸렬함만 못하다' 라는 뜻인데, <노자> 제 45장의 '대성약결(大成若缺 : 큰 성취는 모자란 듯함)'과 '대교약졸(大巧若拙 : 큰 기술은 졸렬한 듯함)"을 하나로 엮어 만든 문장이다. 위의 일화와 함께 이 글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머리에 쥐 날 만큼 알 듯 모를 듯한 <노자>의 글귀를 누가 이처럼 정곡을 콕 찔러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군고구마 장수만이 지니고 있을 절박한 삶의 문법을 간취하여 풀이한 <노자>의 한 구절이라니. (p.809 장일순 편)

 

 

 

 

1. 별 기대없이 읽다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9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거의 정독했다. 책의 문장을 일부 옮겨 적었다. 접힌 곳을 다 옮겨적으려 했으나 팔목이 부러질 것 같아 3분의 1정도만 옮겼다. 

 

2. 이 책에 나온 인물 중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철학 하신 우리 조상님들이 이렇게나 매력적이었다니. 나는 이들에게 푹 빠졌다.

 

3. 무위당의 군고구마 장수 이야기를 읽고 바로 동네 책방에 가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를 구입했다. 저렇게 설명한 노자라면 분명 재미나겠지. 

 

4. 우리 철학자들을 이렇게 매력적으로 그린 전호근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마침 오는 8월에 김해 동네 책방에 오신다니, 꼭 만나뵈어야 겠다. 어떤 분인지, 어떤 말씀을 하실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