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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이야기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 채사장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by Keaton Kim 2018. 10. 14.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 채사장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식구들이 놀아주지 않는다. 우씨~~. 고딩 큰 넘은 학교에 무슨 개꿀을 발라놓았는지 집에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만나야 놀아주지. 답답한 내가 지 만나러 산청에 있는 학교까지 간다. 둘째 중딩 딸은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뮤지컬인지 뭔지를 하는데 주말엔 온종일 거기에서 논다. 그게 아니면 춤추러 가던가. 주말에 아빠한테 놀러오라고 했더니 바빠서 안.돼.요. 단칼에 짤렸다. 휴일 아내는 더 바쁘다. 시간도 없을 뿐더러, 아예 나랑 놀아줄 생각이 없다. 그나마 초딩인 막내가 나랑 놀아주는 유일한 가족이다. 근데 이 넘도 약속이 생기면 아빠보단 친구다. 주말에 집에 오면 혼자 TV를 보거나 도서관 가기 일쑤다.

 

 

 

직장에서는 눈치가 따갑다. 얼마전 현장에서 사람이 떨어져 다치는 사고가 있었는데, 이걸 보고하느라 진땀을 뺐다. 보고서 내용 때문에 질타를 받기도 하고. 보고 해야할 지 말아야할 지에 대해, 또는 어떤 식으로 보고할 지에 대해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본다. 사소한 내 행동 하나도 눈치를 살핀다. 예전엔 내가 할 일만 하면 되었는데 말이다.

 

 

 

힘들다. 시간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내가 점점 낯설어 간다. 사람들을 만나기도 귀찮다. 심지어 친구조차도. 집 앞의 황금빛 들녘도 오랜만에 보는 파란 하늘도 아무 감흥이 없다. 이런 중년의 모습은 나와는 거리가 멀거라 여겼다. 당황스럽다. 처음엔 동굴에 잠깐 쉬로 들어왔는데, 사람들이 작대기로 자꾸 찌르길래 그걸 피하다 보니 점점 동굴 깊숙히 들어와버렸다. 이젠 어디로 나가야 되는지도 모를 정도로.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한때 나는 세상의 중심에 서 있었고 이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세계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어떤 이들은 세계가 자아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반면 다른 이들은 세계가 자아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관에 의해 해석되는 무엇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실재론자'로,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을 '관념론자'로 이름 붙여서 구분짓는다. (p.32)

 

 

 

 

나는 세상 위에 발 딛고 서 있었는데, 어느날 보니 세상은 내 어깨에서 앉아 나를 짓누르고 있다. 이전의 세계와 지금의 세계는 달라졌나?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달라져서 세계가 달라져 보이는 걸까?

 

위의 사진은 샤갈의 <산책>이라는 그림이다. 땅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남자는 샤갈이고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그의 부인 벨라다. 샤갈은 활짝 웃고 있고 벨라는 하늘을 둥둥 날아다닌다. 얼마나 행복했으면.

 

물론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훨훨 날아다니던 그런 세계가. 지금은 샤갈이 발 딛고 서 있는 땅 백미터 아래로 땅을 파고 들어가 웅크리고 있다. 주위엔 아무 것도 없고. 나의 상태에 따라 세상이 바뀐다. 채사장은 책에서 이 그림을 예로 들며 나의 변화에 따라 세계도 바뀐다고 설명했다.

 

사진 출처 :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36219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난 어디로 가고 있나.' 이 지경쯤 되면 흔히 드는 물음이다. 행복한 상태에서는 절대 이런 생각 안난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던져진 이 세계는 어떠하며, 우연처럼 만나 함께 하는 타인들 속에서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이 진지하고도 하찮은 질문. 인류가 생겨나면서 시작했을 법한 이 질문에 대해 채사장은 나름의 답을 이 책에서 하려고 했다.

 

 

 

전작 <열한 계단>에서 자신의 사고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설명했다. 동승했던 사람이 죽고 자신도 많이 다쳤다. 정신적 트라우마로 그는 몸이 다 나았는데도 다시 입원했다.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렇다. 그가 이토록 이 문제에 집착?하는 이유를 어림짐작했다. 그의 일기 같기도 한 이 책에 나와있는 여러 에피소드가 다 좋았지만 그의 가족사와 개인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소년병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특히 좋았다.

 

 

 

당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일수록 사회는 그것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내적 성장, 당신의 영혼, 당신의 깨우침, 당신의 깊은 이해. 그 어떤 것도 사회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세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놀랍도록 독특하고 유일한 자아라는 존재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의 신비로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 경제는 소비자와 시장의 관계를 말하고, 정치는 시민과 정부의 관계를 말하며, 사회는 대중과 지역사회의 관계를, 과학은 인류와 자연의 관계를 말할 뿐이다. (p.26)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일까? 어떤 구체적인 근거도 없지만 나는 이렇게 믿는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라고. 태어나기 이전에 근원적인 내가 스스로 무엇을 배울지를 결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이 짧고 유한한 세계를 선택한 것이라고 말이다. (p.117)

 

 

 

그래서 행운이다. 당신이 충분히 나이 들었다는 것은 서른을 넘기고, 마흔을 넘기고, 노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의 부조리와 대면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고, 이별하고, 삶의 누추함과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당신이 이제야 비로소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남겨온 보석 같은 고전을 읽을 준비가 끝났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어릴 때 책을 읽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아니라 당신이 책을 펼쳐야 한다. (p.181)

 

 

 

사진 출처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1418776&memberNo=32435713

 

 

 

이전 책에서 저자가 그토록 깊게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짧은 인생에 어떻게 그토록 높은 경지에 다다랐는지 그의 매력에 빠졌다. 머리 속 이야기를 단순하고 공감할 수 있게 전달하는 능력에 감탄했다. 그의 팬이 되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타인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 의식 저 너머에 있는 그 무엇, 죽음이 어떻게 삶을 의미있게 하는가 라는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고뇌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자신도 세계와 타인과의 관계에 서툴렀다고 고백한 저자는 젊은 나이에도 인생의 막바지에야 읊을 수 있을 듯한 통찰의 문장들을 쏟아냈다. 먹먹하고 아름답다.

 

 

 

근데, 이런 고민은 잠깐잠깐 해야 된다. 오래 고민해봐야 별로 도움 안된다. 고민할수록 점점 동굴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동굴은 잠깐 머무는 곳이지 오래 살면 스스로를 해친다.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샤갈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사랑하는 연인이 손을 잡고 밤을 같이 보내는 그 순간, 그들은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 세계는 그들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일상의 하찮음은 주변부로 사라진다. 동굴 속에서의 생활이 나는 이제 지겹다. 어떻게든 기어나가서 아주 오래 전에 했던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저 놀라운 경험을 다시 맛보고 싶다. 그러나 길을 찾지 못해 여전히 헤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