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은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 :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할배의 뒤통수가 돋보이는 책 표지 그림이 유난히 시선을 붙잡는다. 캄캄한 어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얀 도화지에 할배는 무얼 그리 열심히 쓰고 계시나. 꽤 묵직한 느낌이 드는 이 그림은 독일 화가 팀 아이텔 그림이라고 한다. 할배의 모습이 너무 엄숙하고 단호해서 머 쓰고 계세요? 라고 물어볼 수도 없을 것 같다. 편집자는 어떻게 이 그림을 골랐을까. 왠지 이 책 제목 <밤이 선생이다>와 어울린다.
팀 아이텔 <무제 - 관찰자>
할배의 뒷모습이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의 다른 그림을 보니 다 뒤통수만 나온다. 팀 아이텔은 얼굴 정면을 그리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고.
그림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22756
할배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심야 까페에 앉아 있는 이 여인 그림이 생각난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인데 비해 까페 안은 환하다. 장갑도 모자도 쓴 채로 무심한 표정으로 커피잔을 보고 있다. 정적만이 감도는 까페에는 그녀 혼자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할까. 표정으로는 읽을 수가 없다. 그녀의 자태가 외롭고 어쩐지 쓸쓸해 감히 혼자세요? 라고 물어볼 수 없을 분위기다. 왜 이 그림이 연상되었을까? 잘 모르겠다. 단지 밤이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
에드워드 호퍼 <Automat>
이 그림에 누군가 <밤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라고 제목을 붙였다. 묘하게 공감된다. 매끈한 다리의 저 언니를 보고 있는 내 시간도 느리게 간다.
# 1.
왜 굳이 <밤이 선생이다>라고 했을까? 나같이 평범한 직장인에게 밤은 낮의 고단함을 풀어주는 시간일 뿐이지만,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밤은 창조의 시간이라고 선생은 말한다. 산만함이 가득 묻은 낮의 시간보다는 정적과 고요가 흐르는 밤의 시간이 곧 생산의 시간일 수 있겠다. 혹은 '밤의 어둠이 은유하는 힘듦, 어려움, 고난이 바로 우리 삶의 선생이다' 라고 해석하는 건 너무 확대일까?
오페라 <심청>의 대본을 쓴 사람에게 정작 그 착상을 도와준 것이 있다면, 아마도 괴테의 <파우스트> 가운데 한 구절,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라는 그 유명한 구절일 것이다. 여기서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낭만주의 이후의 문학, 특히 시는 이 밤에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p.220 <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 중에서)
# 2.
선생의 글을 보면 참 세련되고 점잖타. 선생의 성향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엔 그렇지 않았나보다. 그 시절 외국 서적을 구하기 위해 선생이 애쓰던 모습이 책에 나온다. 외국 서적상에게 주문을 하고, 외환사용허가를 받고, 수표를 보내고, 우체국에 찾으러 가야 한다. 근데 우체국 담당자가 당연히 주어야 할 책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주지 않는다. 선생은 창구 가로대를 뛰어넘어 "내가 공부를 하겠다는데 국가가 왜 방해를 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공부에 대한 열망은 결코 점잖치 않았다.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는 두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p.12 <과거도 착취당한다> 중에서)
# 3.
일본에 있는 몽유도원도 진품이 한국에서 전시되었을 때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오래 기다렸다 그 그림을 잠깐 스쳤다고 한다.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았다기보다 그 앞을 조금 천천히 지나갔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 감동은 대단했나 보다. 가치있고 특별한 것을 대하면 자신의 비루한 삶도 조금 달라질 기대를 저마다 한다.
그래서 몽유도원도의 관람은 일종의 순례 행렬이 되었다. 사람들은 반드시 몽유도원도가 아니라 해도 위대한 어떤 것에 존경을 바치려 했으며, 이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 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 특별하게 가치있는 어떤 것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끈기로 그것을 증명했다. 특별한 것은 사실 그 끈기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두텁고 불투명한 일상과 비루한 삶의 시간을 헤치고 저마다의 믿음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전리풍이었기 때문이다. 아흐레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의 광장에 구절양장을 그린 긴 행렬은 이 삶을 다른 삶과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의 끈질긴 시위였다. (p.27 <몽유도원도 관람기> 중에서)
# 4.
백사마을 이야기가 나온다. 중계동 104번지라 백사마을이라 불리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이야기다. 선생이 글을 쓰신 2011년에도 진행된 재개발 논의가 이제는 거의 마무리라고 한다. 곧 철거가 예정되어 있다고. 다만 전면 재개발이 아닌 보존재개발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최근의 동네 사진을 보니 일부는 이제 빈집이 되어 쓸쓸하고 아직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는 집들도 있다. 선생이 '아름다운 자연 마을' 이라고 했던 그 동네가 어떻게 변할지 나도 기대가 되며 궁금하다.
딱지 장사들이 몰려들 때부터 마을의 구석구석과 주민들의 생활을 그려온 화가 이성국씨는 이 마을을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두어 시간만 마을의 크고 작은 골목길을 걷다보면, 이 마을이 없어져야 할 달동네가 아니라, 우리가 오랫동안 지녀온 좋은 삶의 개념을 신기하게도 고스란히 간직한 아름다운 자연 마을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덮어 가리기가 문제의 해결이 아니란 것을 분명 깊이 이해하고 있을 박원순 시장은 이 마을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p.122 <덮어 가리기와 백사 마을> 중에서)
# 5.
선생은 저명한 문화 비평가이자 불문학자이며 불문과 교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집에서는 그냥 남편이자 아빠다. 나와 다를 바 없다. 아내와 딸이 <파인애플 아미 (이 만화 진짜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초기작이다)>와 <미스터 초밥왕> 이라는 만화를 '시.루.떡.처.럼. 쌓아놓고' 읽는 걸 보고는 시간 낭비니 우짜니 하며 핀잔을 주다가 자신도 만화에 빠져든다. 그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삶을 깊이 있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우리가 마음을 쏟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 어디에나 숨어 있다. 매우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삶을 구성하는 것 하나하나에 깊이를 뚫어 마음을 쌓지 않는다면 저 바깥에 대한 지식도 쌓일 자리가 없다. 정신이 부지런한 자에게는 어디에나 희망이 있다고 새삼스럽게 말해야겠다. (p.212 <먹는 정성 만드는 정성> 중에서)
# 6.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p.164 <빈집> 중에서)
선생이 인용한 기형도의 시를 천천히 읽는다. 선생은 이 시를 두고 '슬프다'고 했는데 나는 '쓸쓸하다'. 기형도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라고 했는데 나는 '사랑을 잃은 나는 쓰네'다. 나도 사랑을 잃고 쓴다. 그런 내가 쓸쓸하다.
# 7.
선생의 글은 매우 세련되어 멋진 슈트를 빼 입은 신사같다. 겉모습만 신사가 아니라 얼굴에서도 그 마음됨이 보이는 그런 진짜 신사 말이다. 그렇다고 그 신사가 이질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매우 현실적이다. 선생은 평론가이지만 누구 못지 않은 문장가다. 선생이 대학교 3학년 때 간, 지금은 태백시가 된 황지를 묘사한 문장이 아래 글이다.
작고 낮은 집들도 포장이 안 된 도로도 모두 시커멓게 탄가루를 둘러쓰고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솔밭에서는 길고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렸다. 검은 길바닥에는 함부로 버린 개숫물이 얼어붙어 있고, 거기 함께 얼어 있는 밥풀을 떼어 먹으려는 듯 역시 탄가루를 둘러쓴 여윈 개들이 안타까운 혀로 검은 얼음을 핥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적막하고 적막한 만큼 아름다웠다. 어둡도록 검은 풍경과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새파랗고 햇빛은 이상하게 찬란했다. 나는 춥고 배가 고팠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더 고양되었었다. 아마도 인간에게 전혀 호의를 내보이지 않는 자연, 날카롭게 날이 선 돌과 바람과 흙에 자기 육체를 직접 부딪치고 사는 그런 삶의 개념을 그 풍경 속에서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p.158 <찌푸린 얼굴들> 중에서)
선생이 품은 생각을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선생은 말했다. 그리고 이 책은 선생이 말한대로 표현된 글이다. 주로 2000년대 초반의 글이 주를 이루고 80년대와 90년대에 썼던 글도 있다. 오래된 글이지만 지금 읽어도 좋다. 좋은 글은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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