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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외국)

이젠 마음의 창에 불을 켤 때 :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by Keaton Kim 2018. 12. 31.

 

 

 

이젠 마음의 창에 불을 켤 때 :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2017년 노벨문학상을 탄 가즈오 이시구로가 1989년에 발표한 소설입니다. 아니, 하루키도 못탄 노벨문학상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이 냥반이 탔다고? 대단한 일본인이네... 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실은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에 영국으로 이주하여 계속 거기서 자라고 살며 글을 썼습니다. 정체성은 일본인이고, 그 외는 영국 사람이겠지요. 지인의 추천과 함께 뭔가 있어 보이는 제목도 그렇고, 어떤 책인지 궁금했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1956년 영국의 한 저명한 저택인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을 살아온 스티븐슨은 그가 모시던 달링턴이 죽자 새로운 미국인 주인을 모십니다. 새 주인의 권유로 6일간의 휴가를 떠나게 됩니다. 집사라는 일을 수행하느라 집을 떠난 적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든 적도 없는 스티븐슨은 이 여행을 통해 지난 날을 회고하고, 젊은 시절 자신과 같이 일하면서 약간의 썸이 있었던 켄턴 양도 만납니다. 

 

 

 

책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뚜렷한 서사도 없습니다. 주인공 스티븐슨이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지만 썩 흥미롭지는 않습니다. 갸우뚱합니다. 대체 작가는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라고 물으며 후반부로 넘어갔으나 여전히 재미없기는 매한가지이고 몇 번을 갸우뚱거렸습니다. 그러다가 책을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구? 입에서 이런 낱말이 튀어나고 머리 속은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유명한 상도 많이 받았대메? 정리가 좀 필요합니다. 몇 가지 떠도는 생각들을 잡아서 옮겨봤습니다.

 

 

 

 

 

 

1. 나는 어떤 자세로 일을 하며 목표는 무엇인가

 

 

 

주인공 스티븐슨은 평생 집사로 살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대단히 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능력있는 집사가 되기 위해 고민하고 그에 맞는 품위를 갖추려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주인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 관계를 형성하며 달링턴 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훌륭하게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는 품위를 갖춘 '위대한 집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자신을 절제하며 노력한 끝에 그는 충실하고 위대한 집사가 되었습니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적어도 직업인으로서의 그는 매우 훌륭한 집사임에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2. 나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스티븐슨은 자신의 일에 충실하느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게 옳다고 믿었고 아버지도 이해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켄턴 양이 보내는 사랑의 메세지도 무관심하게 대했습니다. 여러 차례 암시를 주었으나 스티븐슨은 모른체 했고, 결국 켄턴 양은 결혼을 위해 떠납니다. 20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켄턴 양은 "저는 당신과 함께 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하기도 한답니다." 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있을 자리를 정확히 알고 있죠. 가족의 곁에요. 혹시나 그들이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노년에 이르러 꽃 피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지만 작가는 이런 나를 바로 비웃고 맙니다.

 

 

 

물론 젊었을 때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세계 전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앞날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고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스티븐슨의 미래는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그는 당시 그녀를 잡지 않은 것을 후회해 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자신의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 하고 그는 자문합니다. 그러면서 집사의 일에 더 매진하려고 다짐하지요.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3. 내가 믿고 있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집사로서 개인적인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헌신으로 모셨던 주인은 "선량하고 명예를 중시할 뿐 아니라 현실을 보는 눈도 어두었기 때문에" 나치에 이용당했고 그래서 초라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스티븐슨은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장인 정신으로 자신의 과거의 행적을 미화하려 하지만, 주인의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에 복종하고 동조하였기에 그의 삶도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그리고 그의 주인이 하는 일에 대해 옳고 그름을 구분할 의지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 하지 않았죠.

 

 

 

책의 해설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등장합니다. 600만여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데 앞장선 전범 아이히만은 도착적이고 가학적인 성향을 지닌 괴물이 아니라 명령에 복종하고 근면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아차 싶었습니다. 스티븐슨이 아이히만에 비유될 정도로 나쁜 인간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한다는 본질은 같은 거라고 볼 수 있겠군요.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스티븐슨의 삶은 약간 잘못되었다 정도가 아니라 완전 대실패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파악하고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노력을 하여 그의 주인에게 충고라도 해야 옳았을까요? 집사의 위치에서 그렇게 하기가 참 어려울텐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군요. 생각이 많아지는 부분입니다.

 

 

 

4. 그럼 이제 남아있는 나날을 어떻게 살아야하나

 

 

 

그래서 스티븐슨은 여태의 삶에 대해 대오각성하고 남아있는 생을 아주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뛰쳐나갔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일상으로 복귀합니다. 자신에게 부족한 '농담' 아이템을 장착해서 새 주인과 더 잘해보자고 다짐하면서 말이에요. 그게 옳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책에서는 밝은 분위기로 마무리합니다. 마지막에 만난 노인은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입니다. 아침 점심이 잘못되었어도 지금은 저녁이고 이제 남은 시간도 그리 길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도 적절한 순간이며 '늦은' 때란 없다고 작가는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겠다는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겨우 농담 따위를 배워야겠다는 작은 변화이긴 하지만 주인공 스티븐슨은 어떻게든 조금씩 변할 것임엔 분명해 보입니다. 일말의 희망을 봅니다.

 

 

 

 

1993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유명한 소설은 다 이렇게 영화로도 만드는 갑다. 안소니 홉킨스가 주인공 스티븐슨을 맡았다. 그닥 재미있어 보이진 않는데....

 

사진 출처 : http://geue.tistory.com/entry/%EC%98%81%ED%99%94-%EB%82%A8%EC%95%84-%EC%9E%88%EB%8A%94-%EB%82%98%EB%82%A0%EB%93%A4-%EC%A0%9C%EC%9E%84%EC%8A%A4-%EC%95%84%EC%9D%B4%EB%B3%B4%EB%A6%AC-%EA%B0%90%EB%8F%85

 

 

 

이봐요, 형씨.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소만, 만약 나한테 묻는다면 이런 태도는 정말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알겠어요? 만날 그렇게 뒤만 돌아보아선 안됩니다. 우울해지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요, 이제 당신은 예전만큼 일을 해낼 수 없어요. 하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우리 둘 다 피 끊는 청준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p.300)

 

 

 

무슨 상을 받는 책의 공통점은 뭘 딱 부러지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두루뭉실하게 이야기하고 결말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런 건가? 저런 건가? 이렇게 막 생각해야 하는 책이 대부분입니다. 오히려 그래서 명작이라고 불리는지도 모르죠. 읽은 이가 저마다의 이미지를 갖게 하는 책 말이죠. 이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웅도 안 나오고, 기승전결도 별 거 없고, 썸이랄 것도 살짝 나오다 맙니다. 문제도 담담하기 그지 없습니다. 읽고 나서도 잔잔합니다. 다만 그 잔잔함을 곱씹다 보면 번쩍 하는 각성은 아니지만 아, 이런 거구나 라는 느낌이 나오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어떤 노인이 주인공에게 한 대사를 옮겨 적었습니다. 지난 날이 잘못되었더라도 뒤만 바라보아서는 안되겠지요. 이불킥이 절로 나오는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나에게는 아직 남겨진 날들이 있습니다. 허망한 과거가 있다 하더라도 삶은 어떻게든 지속됩니다.

 

 

 

이젠 마음의 창에 불을 켜고 미처 알아채지 못한 소중한 인연과 내게 남겨진 시간을 생각해 볼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