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도 좋고 책도 좋구나 : 신카이 마코토, 카노 아라타 <언어의 정원>
형, 그거 책으로 읽으면 영화와는 또 달라. 한번 꼭 읽어봐.
아이들과 잠깐 들른 서점에서 이리저리 책 구경을 하다 <언어의 정원>를 발견했습니다.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저 대사가 생각났습니다. 2년쯤 전의 일인데도 말이죠. 독서 모임에서 함께 공부하던 한주 녀석이 자기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라며 영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고 추천하던 책입니다. 그 기억이 떠올라 바로 샀습니다.
영화를 본 지는 오래되어 내용은 선명하지 않지만, 아직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건 비가 내리는 장면의 놀라운 영상미입니다. 응? 이거 만화 맞어? 싶을 정도로 사실적이면서 아름답던 공원의 풍경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알게 되어 그가 이전에 만들었던 영화 <별을 쫓는 아이>와 <초속 5센티미터>도 다시 봤습니다. 첨 볼 때와는 역시 달랐습니다. 물론 가장 최근의 <너의 이름은>도 극장에서 만났었죠.
우렛소리 희미하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면 그대 붙잡으련만
타카오는 구두장이를 꿈꾸는 고등학생입니다. 비 오는 날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법칙을 만들고서는 비만 오면 학교를 땡땡이치고 신주쿠 교엔이라는 공원으로 갑니다. 거기서 혼자 구두를 스케치하죠.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초콜릿을 안주로 맥주를 마시는 신비롭고도 이상한 여인 유키노를 만납니다.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듯한 여인입니다. 이윽고 특별한 약속을 하지 않아도 비 오는 날이면 둘은 같은 장소에서 만남을 이어가고, 마음이 통하게 됩니다. 걷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그녀을 위해 다카오는 구두를 만들어 주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장마는 어느새 끝나가고.....
위의 시는 타카오와 유키노가 처음 만나는 날, 유키노가 수수께끼처럼 읊조린 단카입니다. 유키노의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우렛소리 희미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나는 여기 머무르오 그대 가지 마라 하시면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흠뻑 비를 맞고 유키노는 타카오에게 속삭입니다. 라면 먹고 갈래? 유키노의 집에서 타카오는 그녀를 위해 오므라이스를 만듭니다. 둘이서 맛나게 먹고는 커피 한 잔을 마십니다. 커피향을 맡으며 타카오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낍니다. 그 순간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타카오. 휘몰아치는 눈물과 감정들. 그리고 마침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내보임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데.....
유키노의 사정을 알게 되고는 그녀에게 보내는 타카오의 답가입니다. 타카오의 마음이겠지요. 이렇게 시로 표현하니 그 마음이 더 절절합니다.
위의 모든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책을 다 읽고 딸과 함께 다시 영화를 봤습니다. 좋았습니다. 좋다는 말 밖에. 책과 영화는 분명히 다른데, 머가 다르다고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네요. 영화에서 장면과 장면 사이에 내가 미처 놓쳐버린, 하지만 감독이 말하고자 의도했던 부분을 책에서는 친절하게 설명한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영화는 영화대로 책은 책대로 좋았습니다.
근데, 유키노와 타카오는 어떻게 될까요? 일본 영화는 다 좋은데 너무 열린 결말이라. 아니, 열린 결말이기는 커녕 결말 자체가 없으니. 타카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들은 다시 만나 뜨거운 연애를 시작할까요? 그리고 결혼도 할까요? 유키노가 나이가 들면 젊은 타카오는 바람을 필까요? 애를 둘 쯤 낳으면 그들도 소 닭 보듯 할까요? 이런~ 너무 나갔나요?ㅋㅋ
영화에 비 속의 아름다운 신쥬쿠 교엔(타카오와 유키노가 만나던 공원)을 보고 있자니, 옛날 추억들이 절로 뭉게뭉게 피어오릅니다. 지금은 소 닭 보듯 쳐다보는 아내와 신혼 시절 자주 가던 데이트 코스였어요. 첫째 산이를 낳고도 가끔 갔더랬습니다. 넓디 넓은 잔디밭에 누워 도코모 빌딩을 바라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P.S.
나는 안 돼.
머가요?
요리. 뭘 만들어도 정말로 맛이 없는 것 같아. 나는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내놓았는데 다들 묘한 표정을 짓더라.
하지만 매니큐어는 예쁘게 바를 줄 아시네요.
뭐라고? 넌 때때로 정말 고등학생답지 않은 말을 하는구나. 네, 짐작하신 대로 매니큐어만 예쁘게 바르고 요리는 할 줄 모르는 여자입니다.
저기, 혹시 밥을 잘 못하는 건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거나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 아니에요?
음..... 그렇게까지 분명하게 생각한 건 아니지만.
아마 그건 상관없을걸요.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에요.
그런걸까?
손톱을 예쁘게 칠하거나 화장을 잘하는 거랑 똑같다고 생각해요.
아, 나 화장 잘해?
그런 것 같은데. 정성이 들어가 있어요.
비오는 날은 널 만나니까 특별히 정성스럽게 화장하고 오거든.
진짜요?
거짓말이야.
뭐야.
화장은 자주 칭찬받아. 남고생한테서 칭찬받은 건 처음이지만. 그러고 보니 화장을 잘하지 못해서 곤란했던 적은 처음부터 없었네.
밥을 하는 것도 그거랑 같지 않을까요?
신기하네. 그런 걸 잘하고 못하는고는 어떻게 결정되는 걸까?
잘 못하는 것에 이유라고 할 만한 건 없지 않을까요? 그런 건 의외로 합리적이지 않은 거라고 생각해요.
밥을 정말 못한다고 자책하는 유키노와 그런 유키노를 달래는 밥 잘하는 타카오의 대사입니다. 열심히 노력한다고 안 되는 일도 있고, 별로 힘 안들이고도 잘 하는 일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묻지 마세요. 그건 그냥 그런 겁니다. 그냥요.
이런 대사를 하는 타카오 이넘, 보통 단수가 아닌 것 같군요. 저러니 여자가 넘어올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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