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병원에 가셨는데, 오빠야 니가 좀 가봐야 될 것 같다." 동생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고, 나는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진료실 앞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아버지, 아버지, 진료는 보셨어요?" 하며 깨웠고, 아버지는 의사를 만났는지 안만났는지도 모르겠다고 어눌하게 말씀하셨다. 혹시 몰라 1층 접수에 가니 이미 접수는 했다고 한다.
담당 간호사에게 다가가 어찌 된 일이냐고, 의사를 뵐 수 있냐고 물었다. 간호사는 진료는 봤고, 아마도 부정맥이 원인인 것 같으니, 부정맥으로 다니던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근수 내과에서 간호사가 모시고 왔다고 했다. 요약하면 몸이 좋지 않아 근처 내과에 가서 링겔을 맞았는데, 그래도 호전되지 않고 계속 상태가 좋지 않자 간호사가 이 병원으로 모시고 온 것이다.
아버지는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여서 조금 더 앉아 쉬게 했다. 부정맥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자고 하니, 지금은 그럴 정신이 없다며 그냥 집에 가자고 하셨다. 부축을 하여 겨우 차에 태우고 집으로 왔다. 집은 찜통이었다. 일단 거실에 눕혔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몸이 뜨겁다며 물수건으로 연신 닦았다.
"에어컨 같은 거 필요 없다." 매년 그렇게 말씀하셔서 진짜 그런 줄 알았다. 이 정도로 더운 집에 누워 있으면 없던 병도 걸리겠다. 자책을 하며 바로 에어컨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안되고 내일 설치할 수 있다고 한다. 얼른 해달라고 연거푸 부탁을 했다.
찜통 같은 거실에서 아버지가 잠이 들고 어머니가 좀 진정할 수 있을 때까지 있었다. 약속이 잡혀 있어 계속 있을 수 없었다. 사실은 너무 더워서도 그랬다. 저녁에 다시 올게요 하고 나섰다. 볼일을 다 보고 저녁 무렵에 다시 왔다. 오니 어머니가 건물 출입구에 앉아 계셨다. "왜 나와 계세요?" 하고 물으니 아버지가 병원에 가서 아직 안오셨다고 한다.하! "엄마, 아까 내가 병원에서 모시고 왔어요. 올라가요."했다. 응, 그래? 하셨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여전히 누워 계셨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부고는 그다지 두렵지 않다. 내가 살아서 읽은 책 몇 권이 나의 마음과 함께 무無로 돌아가고, 내가 쓴 글 몇 줄이 세월에 풍화되어 먼지로 흩어지고, 살았을 때 나를 들뜨게 했던 어수선한 것들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적막해지는 사태가 좋거나 나쁜 일이 아니고 다만 고요하기를 나는 바란다. 이승에서의 신산한 삶을 위로할 만한 지복이나 구원이나 주막이 없어도 나는 괜찮다. (7쪽)
거기서 사케를 마셨다. 주모는 허리가 굽은 늙은 여성이었는데, 화장이 너무 짙어서 허무해보였다. 큰 개를 기르고 있었는데, 개도 늙어서 눈 뜨기를 힘들어했다. 뜨거운 사케의 부드러움이 몸의 바닥에서부터 스며들어 오니까 늙은 주모의 빨간 립스틱이 주는 허무감도 견딜 만했다. 사케는 겨울의 술이고, 나이든 사람의 술이다. (17쪽)
여기저기서 또래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온다. 오래 누워서 앓던 사람들은 천천히 죽고, 보약 먹고 골프 치던 사람들은 갑자기 죽는다. 남의 집에 저녁 마실 온 듯이 문상 왔던 사람들이 몇 달 후에 영정 속에 들어가서 절을 받고 있다. 내가 미워했던 자들도 죽고 나를 미워했던 자들도 죽어서, 사람은 죽고 없는데 미움의 허깨비가 살아서 돌아다니니 헛되고 헛되도다. (35쪽)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내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43쪽)
유언을 하기는 쑥스럽지만 꼭 해야 한다면 아주 쉽고 일상적인 걸로 하고 싶다. "딸아, 잘 생긴 건달 놈들은 조심해라", "아들아, 혀를 너무 빨리 놀리지 마라" 정도면 어떨까 싶다. (52쪽)
김용택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김용택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셨는데, "네 어머니가 방마다 아궁이에 불 때느라 고생 많이 했다. 부디 연탄보일러를 놓아 드려라"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아버지, 퇴계 선생님, 김용택의 아버지, 이 세 분의 유언 중에서 나는 김용택 아버지의 유언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 유언은 건실하고 씩씩하고 속이 꽉 차 있다. 김용택의 아버지는 참으로 죽음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아침마다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가듯이 가볍게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인생의 당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계셨다. 이 정도 유언이 나오려면, 깊은 내공과 오래고 성실한 노동의 세월이 필요하다.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53쪽)
어린아이들은 길을 걸어갈 때도 몸이 리듬으로 출렁거린다. 몸속에서 기쁨이 솟구쳐서 아이들은 오른쪽으로 뛰고 왼쪽으로 뙨다. 아이들의 몸속에서 새롭게 빚어지는 시간이 아이들의 몸에 리듬을 실어준다. 호랑이나 사자의 어린것들도 스스로 기뻐하는 몸의 율동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것들은 생명을 가진 몸의 즐거움으로 발랄하고 그 몸들은 신생하는 시간과 뒹굴면서 논다. 이 장난치는 어린것들의 몸의 리듬을 들여다보는 일은 늙어 가는 나의 내밀한 즐거움이다. (95쪽)
봄에 태풍전망대에 올랐더니, 먼 산천의 초록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선연했고, 수목의 향기가 시간 속에 녹아들었다. 이런 날에는 나는 이 세상에 더 오래 머물고 있고 싶다. (97쪽)
한국의 근대사는 가야 할 길이 멀고 발걸음이 다급했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을 초개草芥로 여기는 사회 풍조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것이 지나친 말이라는 것을 내가 모르지 않거니와, 국가와 사회가 인간 생명을 유린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목표와 사명을 설정해 놓고 그쪽을 향해서 죽음에 죽음을 잇대는 돌진을 강행해 온 것도 사실이므로 나의 말을 다소 거칠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117쪽)
책을 읽다가 눈이 흐려져서 공원에 나갔더니 호수에 연꽃이 피었고 여름의 나무들은 힘차다. 작년에 울던 매미들은 겨울에 죽고 새 매미가 우는데, 나고 죽는 일은 흔적이 없었고 소리는 작년과 같았다. 젊은 부부의 어린애는 그늘에 누워서 젖병을 물고 있고 병든 아내의 휠체어를 밀고 온 노인은 아내에게 부채질을 해 주고 물을 먹여 주고 입가를 닦아 주었다. (127쪽)
나는 한국어로 문장을 쓸 때 주어와 동사의 거리를 되도록이면 가까이 접근시킨다. 주어와 동사가 바짝 붙으면 문장에 물기가 메말라서 뻣뻣해지지만 문장 속에서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선명히 알 수 있고, 문장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해진다. 주어와 동사의 거리가 멀면 그 사이의 공간에 한바탕의 세상을 차려 놓을 수 있지만 이 공간을 잘 운영하려면 글 쓰는 자의 몸에 조사들이 숨결처럼 붙어 있어야 하고, 동사의 힘이 문장 전체에 고루 뻗쳐 있어야 한다. (135쪽)
사유의 바탕이 성립되지 않거나 골조가 허술하거나 전개가 무리하거나 애초부터 쓸 필요가 없는 것들을 매문賣文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형용사나 부사 같은 허접한 것들이 문장 속에 끼어들어서 걸리적거리는 꼴들이 역겹고, 그런 허깨비에 의지해서 몽롱한 것들을 표현하려 했던 나 자신이 남사스럽다. (142쪽)
그림 속의 소는 한국 농촌에서 일하는 일상 속의 소이고, 개는 마을에서 돌아다니는 평범한 개이다. 이 개는 주인님의 사랑과 이별에 대해서 아무런 물정도 모르고 따라왔다. 애인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은하수를 넘지 못하는 직녀는 마을로 돌어가야 하고 개가 뒤를 따라갈 것이다. 소 모는 남자(견우)와 베 짜는 여자(직녀)는 농경사회의 노동자들이다. (183쪽)
가야토기의 구멍 안쪽은 어둡고 서늘하다. 박물관에 갈 때마다 나는 그 구멍 안을 들여다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구멍 안에는 언어의 그물에 그릴 만큼 개념화된 것이 없다. 가야토기의 구멍들은 모두 그릇의 아래쪽, 굽다리에 뚫려 있는데, 이 빈 것이 그 위에 얹히는 실물을 받치고 있다. 가야토기의 질감은 평화롭고 곡면은 유연하다. 이 평화는 바라보아도 알 수 있도 만져 보아도 느낄 수 있다. (187쪽)
대가야의 왕조는 신라 진흥왕 때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끝났다(서기 56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이 전쟁의 총사령관이었고 열다섯 살의 소년 화랑 사다함이 전투현장의 선봉장이었다. 신라 진흥왕의 치세는 날마다 피에 젖었는데, 대가야 정벌은 그 유혈의 결정이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가야를 부순 명분을 '가야가 신라에 반叛했기 때문' 이라고 썼는데, '반'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191쪽)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의 자족하고 평화로운 삶을 흑사의 형에게 편지로 적어서 보내면서 그 말미에 썼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적은 없으며 이는 인성人性이 본디 열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이 '열약함'을 아름답게 여긴다. 그리고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두 형제는 국문장에서 있었던 치욕에 관해서는 평생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순교한 친형제 정약종의 죽음과 조카사위 황사영의 죽음에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침묵의 내면이 두렵다. 두 형제도 두려웠을 것이다. (234쪽)
대학 입시설명회, 취업설명회까지 부모가 따라와서 설치는 나라는 지구상에 한국 이외에 없을 것이다. OECD 나라 중에는 이런 나라가 없다. 서른 살이 다 되어 가는 청년들이 가랑이 사이에 기저귀를 차고 옹알이를 하며 어리광을 부리는 꼴인데, 이 모든 청년 소아마비의 풍경에는 '아이고 내 새끼야'의 후렴이 붙는다. (251쪽)
달링누나는 숨이 막히게 아름다워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어머니와 고모, 이모, 할머니들의 꾀죄죄하고 찌든 모습만을 보던 아이들은 달링누나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달링누나는 짧은 치마에 뾰족구두를 신었고 머리는 틀어 올려서 흰 목덜미에 귀밑머리가 흩어져 있었고, 입술은 새빨갰다. 아, 여자란 저럼게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로구나..... 달링누나를 보면서 나는 심 봉사가 눈을 뜨듯이, 천지가 개벽하는 전율을 느꼈다. 달링누나에게 가까이 가면 그 몸과 옷자락에 형언할 수 없이 신기한 냄새가 났는데, 그 냄새는 이 세상의 냄새가 아니었다. (313쪽)
김훈 선생은 1948년 생이다. 일흔 일곱... 상노인이다. 책에 병원에 갔던 이야기도 꽤 나온다. 서슬 퍼렇고 먹먹했던 선생의 이전 글과는 조금 달라졌다. 날카롭지만 따뜻하고 무거우면서도 견딜 만하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늙음이다. 늙기의 즐거움에 관해 썼는데, 늙기의 자연스러움, 늙기의 두려움으로 읽혔다. 여태 읽은 선생의 다른 어떤 책보다 공감했다. 나도 늙어간다는 증거다.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애써 다 옮겼다.
몸이 아픈 아버지도, 치매에 걸린 어머니도, 그리고 김훈 선생도 아프지 말고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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