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삼종경기
내가 하도 학교, 새로운 학교 하니까 대체 어떤 학교를 만들고 싶은 것이냐고 물어오는데요, 그때마다 다음과 같이 짧게 답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악기 연주, 음식 만들기, 스포츠 활동 이 세가지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돕는, 학교 같지 않은 학교를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악기를 다룰 줄 알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자기 감정을 에둘러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들과도 쉽게 교감할 수 있습니다. 가령 하모니카를 잘 부는 소년이라면 중남미 고산지대나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 가서도 금세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겁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음악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음식 만들기도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자기 혼자 먹는 음식에 정성을 다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준비하는 음식이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식재료에서 상차림까지 온갖 신경을 다 씁니다. 낯선 사람도 식탁에서 마주하면 달라집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식탁이 환대의 식탁이라고 생각합니다. 환대에서 우애로! 식탁에서 가능합니다.
운동경기나 악기 연주와 음식 만들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하고도 얼마든지 손을 맞잡게 하는 것이 운동경기입니다. 공을 조금 다룰 줄 안다면 낯선 이들과 얼마든지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몸을 부딪치며 함께 땀을 흘리는 것만큼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하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다. 음악, 음식, 운동 모두 피부색과 언어 차이를 뛰어넘는 세계 공용어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철인삼종경기는 철인鐵人들 전문 종목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경기가 아닙니다. 제가 강철 같은 청년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다만 음악, 음식, 운동 이 세가지 종목을 고루 잘할 수 있다면 철인哲人이 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을 따름입니다. 타인과 더불어, 천지자연과 더불어 자기 철학을 세워가는 젊은이 말입니다. (p.182)
작년 여름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이문재 시인의 글쓰기 특강을 들었습니다. 시인은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 곳까지 여덟 번이나 오셨습니다. 시인이 올 때마다 글 한 편씩 써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분명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특강에 참여한 사람들의 글을 모아 책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을 모시고 자그마한 출판기념회를 갖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미뤄졌고, 거의 일 년이 지난 지금 시인이 동네 책방에 강의 오시는 틈을 타 조촐한 파티를 진행했습니다.
책방에 가니 시인이 와 계셨습니다. 반가왔습니다. 덥석 안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잘 지내시고 계시냐는 인사말과 간단한 근황을 주고 받았습니다. 새로 나온 시집도 있었습니다. 깔끔한 표지가 '나 이제 막 나왔어' 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가 잘 읽혔습니다. '어, 이번 시집은 꽤나 쉽게 쓰셨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에 소개한 <철인삼종경기>라는 시를 읽고서는 우리 아이들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선생이 시에서 말한 학교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간디 학교에서 음악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운동을 하면서 타인과,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자기의 철학을 세워가는 젊은이입니다. 음악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운동을 하는 학교 말입니다. 그리고 저 삼종경기는 젊은이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도 필요합니다.
흔들의자
신도시 아파트 주차장
빨간 주차금지 표지판 옆
흔들의자 혼자 앉아 있다
왼쪽 어깨가 기울었다
누가 내놓은 모양이다
흔들어도 안 흔들렸나보다
흔들지 않아도 흔들렸나보다 (p.23)
누군가 시인에게 시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를 물으니 이 시를 꼽으셨습니다. 왜 라고 물으니 "간단하잖아" 하십니다. 그러면서 혼자말로 "시를 좀 어렵게 써야 하는데...." 하십니다. 주차장 한켠에 버려진 흔들의자를 저렇게 보는 눈을 가진 이가 시인입니다. 나는 이 시를 읽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했습니다.
<구글어스>라는 시에서는 시인이 다녀온 곳, 그리고 시인이 가보지 못한 미래의 장소들이 나옵니다. 가고 싶은 그곳들을 구글어스로 다 볼수 있지만 구글어스에 안들어가겠다고 합니다. 가보고 싶은 여행지에 가보려는, 하지만 이제는 늙어서, 아니면 코로나로 가볼 수 없는 슬픔이 묻어있습니다. <고독사>에서도 '삼십대로 돌아간 노인은 세계지도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나도 그러는데, 시인도 그러하구나 싶었습니다.
시인의 책 말미의 <시인의 말>도 시로 적었습니다. 역시 시인입니다.
혼자의 팬데믹
혼자 살아본 적 없는
혼자가 혼자 살고 있다
혼자 떠나본 적이 없는
혼자가 저 혼자 떠나고 있다
혼자가 혼자들 틈에서 저 혼자
혼자들은 두고 혼자가 자기 혼다
사람답게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저마다 삶을 살고 있다
춤과 노래가 생겨난 이래
지구 곳곳에서 마음 안팎에서
처음 마주하는 사태다
이 낯선 처음이 마지막인지
아니면 이것이 진정 새로운 처음인지
혼자서는 깨닫기 힘든 혼자의 팬데믹이다
<시인의 말>에서 시집 전반에 걸친 시인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혼자가 되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하지만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혼자가 되어버리니 오히려 나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오랜만에 시인을 만나 좋았습니다. 특유의 어눌하면서도 날카로운 말씀도 여전하셨습니다. 만나서 하지 못한 말을 지면을 빌어 대신합니다. "선생님. 얼굴 뵈어서 좋았어요. 선생님의 시도 참 좋았어요.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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