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갑수는 지 입으로 울나라 3대 여행작가라고 했다. 그렇게 우기니 아니라고는 안했다. 대신 나머지 두 명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지도 모른댄다. 고3 시절 갑수랑 한 반이었는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갑수는 교실 뒤에서 장정일의 야한 소설을 읽었다. 자연반도 아닌데 국문과를 간다고 선생님께 혼나기도 했다. 그렇게 국문과를 갔다. 몇 년이 지나고 갑수의 시집이 나왔다. 그러고 또 몇 년이 지나고 여행책이 나왔다. 그 뒤로 줄줄이 책이 나왔다.
여행을 다니고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그걸로 밥벌이를 한다. 이보다 더 행복한 직업이 있을까? 다른 친구들을 만날 때마나 우리 동기들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친구라고 갑수를 자랑했다.
내 옆에 있는 사람
이 사실을 알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절대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요.
내가 사람으로 행복한 적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왜 그사람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얼만큼의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라는 것을요. (내 옆에 있는 사람 중에서)
친구가 말한 울나라 3대 여행작가에 들만한 작가가 김해 작은 책방에 온댄다. 그의 책을 사서 읽었다. 삶이 여행과 글쓰기인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 궁금했다. 설레임과 궁금함을 갖고 책방으로 향했다. 이제니 시인도 함께 오셨다.
강연의 제목이 '시와 여행을 건너온 언어들에 대하여'다. 아, 시인의 책보다 더 멋지다. 누가 붙였는지 모르지만 정말 센스가 있으시다. 작가는 말은 귀로 들어가 잠깐 뇌에 머물렀다 다시 빠져나갔다. 남아 있는 건 작가의 말보다 작가의 이미지였다. 항상 떨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그렇게 남았다. 떨림은 살아있는 순간을 체험하는 일이다. 작가는 매 순간을 스냅 사진처럼 남겨 간직하고 꺼내보는 사람이었다.
나는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안다. 여행이 낭만적이지 않다는 걸 안다. 일상의 구차함과 비루함을 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는 걸 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언젠가는 나를 떠나갈 거라는 걸 안다. 그래서 사람은 결국 혼자라는 사실도 안다. 내 안에 있던 뜨거운 열정은 이제 더 이상 없는 걸 안다. 누군가를 그토록 그리워하던 마음도 이제 다 사그라졌다는 것도 안다. 어쩌면 이런 상태로 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안다. 그래서 나는 형편없이 살고 있다는 것도 안다.
작가는 그럴 땐, 간절해져서 내가 바라던 것들과 내가 잊은 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적어보라고 했다. 작가는 이렇게 적었다.
-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나라 하나를 언젠가 먼 훗날의 목적지로 정하고 무작정 그리워하거나 자주 그곳 날씨를 궁금해할 것.
- 먼 곳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며칠 안에 내려갈 테니 좀 기다려, 라고 무작정 말해놓을 것.
- 바다에서 돌고래떼를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 것인지 알아둘 것.
- 통일이 되면 기차를 타고 세 시간 반을 가면 닿을 수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알아둘 것.
- 녹슨 선풍기를 닦으려면 어떤 약품이 필요한지 잘 알 만한 친구 하나 사귀어 놓을 것.
- 밤새워 밤하늘의 별을 같이 세어줄 사람 하나 친구로 둘 것. (그나저나 당신은 무엇을 좋아했습니까? 중에서)
작가님. 고작 그런 걸로 내가 잊고 있던 떨림을 다시 살릴수 있을까요?
일단, 해보기나 하세요.
화려한 수사 없이 간결한 언어로 쓴 글이다. 시와 여행을 건너오면서 언어는 불필요한 것을 모두 떼어버리고 정수만 남았다. 작가의 글은 상징의 세계 즉, 선과 악, 도덕, 남자와 여자, 아버지, 가족 등에 파묻힌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들어있다. 모든 상징을 들어내고 삶의 정수만 남았다.
사람, 여행, 낭만, 사랑, 열정, 인연, 등 내 마음 속 상자에 꽁꽁 숨겨 놓았던 것들이 살짝 밖으로 나왔다. 이젠 그립다. 문득 화양연화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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