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을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진화하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세상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본다. 공부가 배움을 잃고, 만남이 사귐을 잃고, 노동이 땀을 잃고, 삶이 쓸모를 잃어가는 세상이 결코 진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53쪽)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싶다면, 내 성격이 어떤가를 남들에게 묻기보다 내 혀가 어떤 말을 주로 내뱉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봐야 한다.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기를 원하다면, 성격이 아니라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고 말하는 태도를 바꾸면 된다. 성격은 바꾸기 힘들지만 말의 색채는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선택하고 바꿀 수 있다. (80쪽)
누구나 삶을 견디며 산다. 동정할 까닭도 값싼 위로를 건낼 이유도 없다. 오래 견디면 견디고 산다는 걸 잊게 된다. 견디는 삶도 오래 사랑하면 풍미가 더해지고 즐길만한 삶이 된다. 기실 즐기는 삶이라는 것도 반드시 무언가는 견뎌내야 한다. 오늘의 자유든, 내일의 희망이든 모든 것은 무언가를 견딘 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에 다른 방도는 없다. 즐기든 견디든 당면한 오늘을 기꺼이 살아갈 뿐. (102쪽)
아들은 아내를 얻을 때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다. (130쪽)
언젠가 시골 농부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 그가 경작하는 농장에는 작물을 심지 않고 비워둔 밭이 있었다. 왜 아까운 땅을 묵혀뒀냐고 물었더니 땅도 쉴 때가 있어야 한다고, 휴경기를 가진 땅이 더 풍성사고 알찬 곡식을 맺는다 했다. 사람의 이별이란 것도 일생의 궤적으로 보면 잠시 맞이한 휴경기에 지나지 않는다. (144쪽)
아들의 삶은 아버지의 삶에 대한 처벌이다. 나는 이 송곳 같은 말을 주머니에 넣고 산다.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될 때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이 말을 꽉 움켜진다.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은 의무가 따르는 두려운 축복이다. (161쪽)
처음 인사하는 자리에서 흔히 오가는 질문이 있다. 미국인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묻고, 영국인들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묻고, 스위스인들은 고향이 어딘지를 묻는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학번이나 띠를 묻는다. 자기의 위치를 빨리 정해야 편해지는 것이다. (169쪽)
그런데 말이야, 운동 선수들이 몸에 힘주는 거 봤어? 힘을 빼야 스피드가 나오고 파워가 강해지잖아. 근육이 경직되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부상을 입기 쉽상이거든. 내가 보기엔 두려워하는 거 같아. 힘을 빼면 남들보다 뒤처질 것 같고 무능하다고 손가락질 받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한시도 힘을 못 빼는 거지. 통증이 오고 몸이 망가져가는 데도. (176쪽)
오늘은 어제와 똑같은 아침을 맞는다. 새로울 것 없는 똑같은 일상은 시들하고 권태롭다. 그런데 철학자가 관찰한 늑대는 달랐다. 어둠이 물러가고 해가 뜨면 오늘 아침에도 해를 맞이했다는 사실에 좋아서 날뛰고 살아있다는 사실에 어찌할 줄을 모르는 늑대의 모습을 보면서 철학자는 삶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낀다. 인간은 과연 늑대처럼 오늘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는가를 자문한다. (186쪽)
너는 그냥 살아라. 그래도 무언가는 된다.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다. 너는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네가 네 자신을 인정하며 살아라. 삶의 기준을 네가 정하고 살아라. 네가 좋으면 온전한 삶이 된다. 그래도 괜찮다. 그것이 사람이다. (192쪽)
외로움은 나에게 말하지 않는 너를 바라보는 일이고, 쓸쓸함은 나에게 말하지 않는 나를 바라보는 일이다. (221쪽)
씨발, 글이 주옥같노.
클랩함 정션으로 가는 길
봉제 인형 가득한 너의 방
아스다로 향하는 사람들
마늘 향 넘치던 너의 부엌
넌 내게 묻곤 했지
마음이 무얼까?
마음이 무얼까?
난 네게 대답했지
마음이 무얼까?
모르겠어
모르겠어
정새난슬의 노래 <클랩함 정션으로 가는 길> 중에서 (246쪽)
클랩함 정션은 런던의 어느 역 이름이에요.
아스다는 매우 큰 슈퍼 이름이에요.
클랩함 정션에는 레이크 언니가 살고 있었어요.
그녀와의 첫 만남은 이랬어요.
한국에서 뭐했어요?
당돌하게 물었더니
그냥- 개망나니였어요.
대답했던 그녀,
나는 그 여자에게 그만 푹 빠졌어요.
이 여자는 진짜야, 믿어도 되겠어
확신했고
언니 삭발머리 꿀벌 같아
바로 막말도 했죠.
너 진짜 싸가지 없다. 근데 괜찮아.
그녀는 웃었죠.
우린 그렇게 친해졌어요.
기숙사를 떠나 정착한 그녀의 작은 방.
놀러도 갔어요.
침대 하나 겨우 들어가는 방.
집주인 딸이 갖고 놀던
봉제인형들에게 둘러싸여
윤기 잃은 그들의 시선은
우리를 염탐하고,
갖은 먼지와 쿰쿰한 냄새가 가득했던
그 방.
좁지만 살기좋아
하얗고 단정한 발가락 꼼지락거렸어요.
다진 마늘이 잔뜩 들어간 김치찌개.
집주인 눈치를 보며 날 배웅해주었죠.
아줌마가 마늘 냄새 너무 심하다고.
외로운 아시아 계집애 둘.
역으로 가는 길 조곤조곤
대화 많이 했어요.
마음이 무얼까?
없어지면 좋겠지?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진짜 마음이 무얼까?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
스물 셋, 스물 여섯.
마음이 뭔지 모르는 여자 둘이
낯선 런던에서 이방인 행세하던 시절.
그 시절은 진작에 끝았는데,
나는 아직 궁금해요.
마음이 무얼까.
글 출처 : https://blog.naver.com/ravanelli/220542906119
씨발거, 와이리 먹먹하노. 노래도 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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