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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야기

너희가 노인력을 아느냐 : 아카세가와 겐페이 <노인력>

by 개락당 대표 2025. 3. 11.

 

그런데 그걸(라이카 M6 카메라) 잃어버렸다고 했다.

 

뭐라고? 어디에서 잃어버렸는데? 이렇게 묻자 그걸 알면 안 잃어버렸을 거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상황을 떠올려보면 술집이나 택시에서 잃어버린 듯 한데 술집이라면 다카나시 씨는 늘 가는 단골집이 있는데다가 사진 쪽에서는 유명하니 M6을 놓고 와도 잃어버릴 일은 없다. 그렇다면 역시 택시 아닐까.

 

노인력 덕분이다. 그럴 만했다. 이제 환갑도 지났으니 착착 진행된다. 기억은 꽤 날아갔고, 시력도 꽤 날아갔고, 다리와 허리도 꽤 날아갔으며, 수면 시간도 날아가 아침 일찍 눈이 떠지니 라이카 M6도 날아갔다. 그런데 너무 속상하다. 상당히 심각하다. 아니 노인력이 상당히 많이 강해졌다는 증거다.



"당신 실력이 꽤 늘었군."

 

이런 말을 듣는다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그에 비해 도쿄돔야구장 표 두 장이라니, 나는 아직도 시건방진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다. (179쪽)

 

 

노인력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순 없지만, 그렇다, 애지중지하던 카메라 정도는 잃어버려줘야 "이제 노인력이 좀 생겼네."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의 말처럼 야구표 잃어버린 것 가지고는 노인력 축에도 못낀다. 

 

나이를 먹어가며 체력이 약해져 비틀거리며 걷고, 밤에 앞이 잘 안보이고, 건망증이 심해져 잘 잊고, 한 이야기를 또 한다. 이걸 적극적으로 표현해서 노인력이라 부른다.  

 

일본답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가 시작되었고, 그래서 노인 문제나 그 해결 방법도 우리보다 앞선 게 분명할텐데, 나이들고 늙어가는 걸 '노인력'이라는 것으로 승화를 시키다니. 이런 유머와 해학을 봤나. 일본의 어르신들도 내공이 보통이 아니다.

 

 

 

 

일본의 미적 개념으로 '와비사비'라는 말이 있다. 와비는 소박하고 자연스럽고 완전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말한다. 사비는 오래된 것, 그래서 시간과 함께 변해가면서 발현되는 아름다움이다. 즉 와비사비는 완벽하지 않고 결함이 있는 것, 시간의 흐른 자국이 있는 아름다움, 그래서 간결하면서 소박한 일본의 전통적인 미의 감각이다. 이 와비사비가 사실은 바로 물체의 노인력을 말한다며 흐뭇해 한다. 

 

북한도 노인력의 나라라고 하는 대목도 재미있다. 북한 사람들이 언뜻 초라해 보이고 체제적으로 압박받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느긋하게 생활한단다. 북한 거리에 붙어 있는 '혁명적 낙관주의'나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는 이런 표현들도 노인력이 없으면 결코 나오지 못할 표현들이라고. 심지어 국가적으로 하는 차원이 다른 노인력이라고 했다. 

 

정월 바닷가 / 밟으니 이 나이가 / 몹시 좋구나.

 

니에몬 섬에 붙어 있는 하이쿠(글자 수 5.7.5로 쓴 일본의 짧은 시)인데 시 옆에 '아흔 넷 늙은이 후세이'라고 쓰여 있었다. 작가는 이 시에 감동했으며, 아흔 넷이 그 나이가 몹시 좋다고 하는 시인은 노인력의 고수라 평했다. 

 

작가는 노상관찰학회의 멤버다. 노상관찰학회는 노인력을 발휘해 길거리를 슬렁슬렁 걸으며 슬렁슬렁 건물을 발견해 슬렁슬렁한 감각으로 슬렁슬렁 사진을 찍는다. (작가는 <노상관찰학 인문>이라는 책도 냈다. 아니, 이런 책도!) 그 사진들이 실려 있는데, 책의 내용과 딱 맞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어디로도 연결되 않는 계단. 사진 출처 : https://visla.kr/article/etc/245936/

 

 

낭떠러지와 연결된 문. 사진 출처 : https://visla.kr/article/etc/245936/

 

 

노인은 현역에서 떠났다. 그렇지만 인생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현역 시절보다 인생이 더 압박을 가한다. 오히려 인생밖에 없다고 할까. 생산성에서 벗어나면서 드러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즐기고 좋아해야 하냐에 중심이 옮겨진다. 이는 자급자족적 시골의 힘을 지니는 일이며, 시골의 힘으로 자각하는 일일 것이다. (297쪽)

 

 

안경을 올리고 휴대폰을 눈에 갖다 댄지 벌써 오래다. 중년 최고의 운동은 천천히 달리기라고 유선생이 하도 얘기하길래 나도 따라해봤지만 10분을 넘기기 힘들다. 며칠 전에도 식당에 핸드폰을 놔두고 나왔다. 시골에 집을 짓어 텃밭에 고추 심고 그걸 반찬 삼아 밥 먹는 게 최고의 인생이라 생각한다. 뭐, 이 정도면 나도 노인력의 시작 단계인 건 분명하다.

 

아니야, 내가 노인력이라니. 아직 한창인데. 몸은 조금 늙었을지 몰라도 마음은 이삼십 대라구. 라고 항변해보지만, 빼도박도 못할 증거가 있다. 우리 아이들이다. 막내까지 스무 살이 넘은 세 아이들을 보면, 저 꼼지락거리던 넘들이 저렇게 컸는데, 내가 늙는 게 당연하지, 하고 받아들이다. 

 

이제 더 늙어갈 뿐인데 어떻게 살아야하지?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외친다. 늙음을 슬퍼하지 말고 지난 삶을 후회하지도 마라. 당당하게 유쾌하게 늙음을 받아들여라. 일상에 무심코 지나는 풍경을 허투루 보지 말고, 작은 일에 감사하라. 니가 의미를 두지 않으면 의미 있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매 지나가는 순간을 잡고 의미를 부여해라. 

 

그리고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음, 노인력이 꽤 늘었어. 좋아."라고 툭 뱉어라. 응? 이 정도가 되려면 내공이 얼마나 되어야 하지? 그럼 울엄마는 노인력의 지존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