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더라
- 매창 (1573~1610)
어느 겨울 매창 뜸을 찾았습니다. 겨울 햇살을 덮고 누워있는 그에게 '이화우 흩날릴 제' 한 잔 올렸습니다. 육신은 비쩍 마른 연 대궁처럼 버석거려도 이화우 흩날리듯 걸어올 정인을 기다리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이화우 흩날릴 제' 음복주를 오래도록 혀에 담았습니다. 문살에 부딪히는 달빛 같은 향기가 목을 넘어가다 되넘어 왔습니다. 사랑이 깊은 만큼 외로움도 깊었을 그의 마음이 주련처럼 걸렸습니다. (82쪽, '이화우 흩날릴 제' 중에서)
한뫼책방은 김해인물연구회 산하의 독서모임입니다. 김해 출신인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 한뫼 이윤재 선생의 호를 따서 모임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따뜻한 봄날에 헌쇠도서관의 옥상에서 야외 북콘서트를 연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 책 <슈만의 달밤으로 오는 달밤>의 저자인 김종희 작가를 모셔서 '작가와의 만남'으로 진행한다고 했습니다.
인물연구회 회원은 아니지만 이렇게 연락이 오니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가가 오신다고 하니 책도 사고 읽었습니다. 지난 주 일요일, 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니 회원들이 분주합니다. 낡은 주택의 옥상이었지만, 이리저리 꾸미니 꽤 그럴싸합니다. 봄날 이렇게 야외에 나오니 바람은 상쾌하고 확 트인 주변이 시원합니다.
김종희 작가가 오셨고, 책의 출판사인 '작가마을' 사장님도 함께 오셨습니다. 작가가 주도하여 진행하는 보통의 북 콘서트와 달리 모임의 사람들이 책 소감을 나누고, 궁금한 점을 질문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작가는 소박하고 진솔하게 이야기를 했고, 서로 경청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책의 글은, 어떤 서사라기 보다는 언어의 아름다움을 쓴, 관념과 은유의 문장들이라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아닌 친구인데, 그 집에서 부모님과 밥 한끼를 함께 하는 것으로 의미 있는 친구가 되듯, 작가를 직접 만나 설명을 듣고 보니 그 글들이 달리 보입니다. 희미한 글들이 선명해졌고, 축 늘어진 글들이 생기발랄하게 막 움직였습니다. 이게 작가와 책 동지들과 함께 읽는 즐거움이자 효과입니다.
어떤 언어는 비늘처럼 감성을 일으키고 어떤 언어는 물오른 어린 가지 봉곳한 눈처럼 옵니다. 또 어떤 언어는 해거름 산란하는 빛으로 흔들리고 어떤 언어는 윤슬처럼 떠있습니다. 언어는 그 언어를 품은 사람의 온기와 정감을 담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70쪽, '슈만의 문장으로 오는 달밤' 중에서)
늘 겪는 저녁이고 늘 보던 풍광인데, 평소 지내던 것과 다른 사람, 다른 경험을 하니 그 시간과 풍광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옆을 지나는 공기는 시원하고 별빛 환홥니다. 마지막 사진은 헌쇠도서관 옥상에서 본 분산성인데, 늘 보던 것과 달라보여 한 장 찍어봤습니다. 모임을 마치고 근처에 친구 어머님이 하시는 '산수촌'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고기와 술이 있으니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졌고 과감해졌습니다.
멀리까지 기꺼이 와주신 작가님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행사 물품을 한 트럭 싣고 와서 아름답고 감상적인 저녁 시간이 되게 행사장을 꾸미고 준비하신 한뫼책방의 여러분들에게도 특별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눌 책 동지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눈부신 일입니다. 봄날 옥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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