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다. 아직 이름이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아무튼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데서 야옹야옹 울고 있었던 것만은 기억난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족속을 봤다. 나중에 들은 즉 그건 서생이라는 인간, 인간 가운데서도 가장 영악한 족속이라고 한다. (p.16)
그는 고약한 굴처럼 서재에 딱 들러붙어 일찍이 외부 세계를 향해 입을 연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아주 달관한 듯한 상판대기를 하고 있으니 가소롭기 짝이 없다. (p.39)
그에 비하면 고양이는 단순하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화가 나면 열심히 화를 내고, 울 때는 죽어라 운다. 우선 일기처럼 쓸데없는 건 결코 쓰지 않는다.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주인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은, 일기라도 써서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어두운 방에서나마 발휘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고양이족은 걷고 멈추고 앉고 눕는 일상생활, 똥을 누고 오줌을 누는 자잘한 일 등이 모두 진정한 일기이니, 특별히 그렇게 성가신 짓을 하면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존할 필요학 없다. 일기 쓸 시간이 있다면 툇마루에서 잠이나 자겠다. (p.49)
세상을 살다 보면 세상 이치를 알게 된다. 세상 이치를 알게 된다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나날이 위험이 많아져 방심할 수 없게 된다. 교활해지는 것도 비열해지는 것도, 표리 두 겹으로 된 호신용 옷을 걸치는 것도 모두 세상 이치를 아는 결과이며, 세상 이치를 안나는 것은 결국 나이를 먹는 죗값이다. 노인 중에 변변한 자가 없다는 것도 같이 이치다. (p.250)
저도 간게쓰 군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제 생각에 인간이 절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길은 단 두 길뿐인데, 그 두 길은 바로 예술과 사랑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그 하나를 대표하는 것이니까 인간은 반드시 결혼해서 이 행복을 완수하지 않으면 하늘의 뜻에 반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생님? (p.545)
무사태평해 보이는 이들도 마음 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p.612)
# 1.
나쓰메 소세키(1867~1916). 근현대 일본의 가장 위대한 작가 라고 나온다. 나도 알지. 그의 소설 몇 권 정도는 읽었을 걸, 하고 목록을 보니 한 권도 안읽었다. 이 책이 처음이다. 대개의 경우 모두 알고 있는 유명한 책들을 실제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더니 나도 꼭 그 꼴이다.
# 2.
근데 왜 이 양반이 그렇게 유명한 거지? 노벨상이라도 탔나? 하며 찾아보니 노벨문학상을 탄 일본 작가는 둘이다. 설국을 쓴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968년에, 그리고 소설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오에 겐자부로가 1994년에 수상했다. 소세키 선생은 둘 보다 훨씬 오래 전의 사람이다. 웬만한 일본작가들은 모두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뭐, 천원 지폐에 등장하실 정도니.
# 3.
원제는 吾輩ハ猫デアル이다. 앞 한자는 오배라고 쓰고 와가하이라고 읽는다. 쫌 거들먹거리는 나를 말할 때 쓴다. 이 몸 혹은 본좌 정도로 쓰인다고. 첫 문장을 옮기면 "와가하이와네코데아루. 나마에와마다나이"(이 몸은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이다. 꽤 유명한 첫 문장이라고. 이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라고 번역하신 분은 센스가 장난 아니시다. 뭔가 뉘앙스가 딱 맞다. 기깔난다.
# 4.
1905년에 이 책이 나왔는데, 인기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뒤에 <나도 고양이로소이다>, <나는 개이외다> 등의 아류작들이 쏟아질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의 가장 유명한 문학상인 아쿠타카와상의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도 소세키 선생의 산방을 자주 찾았다고. 소세키 선생이 아쿠타카와의 작품을 극찬하는 편지를 썼는데, 아쿠타카와는 그 편지의 힘으로 작가를 계속 할 힘을 얻었다고 한다.
# 5.
서생의 집에 기숙하는 고양이의 눈에 비친 서생과 그 패거리들의 시덥잖은 이야기가 책의 주된 내용이다. 고양이가 보기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 같잖다내가 봐도 그렇다. 백 년도 훨씬 전에 일본에서 교양 좀 있다는 사람들의 시시껄렁한 일들을 읽고 있자니 이 무슨 시간 낭비냐는 생각에 몇 번이나 책을 던졌다. 이 책이 근대 일본 문학의 정수라는데, 진짜? 왜?
# 6.
책 말미의 해설에서 지식인이 비판적 교양인이라는 관념을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 소세키였고, 그래서 국민작가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여기서 비판이라고 하는 건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가장 잘 나가는 일본과, 그 일본에서 돈과 권력을 좇는 더 잘나가는 일본인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소세키 선생이 추앙받는 건 그도 아주 잘나가는 상류층의 지식이었지만, 인간의 허세와 위선에 대해 늘 비판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그렇지. 그래야 지식인이지. 그런 문화를 선생이 만들었단 말이지. 음...
# 7.
책의 내용이 시덥잖은 이야기라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일본이 가장 잘 나갈 때, 뭔가 사람들의 계몽하는 책이나 일본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내용이 아닌,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뒷담화를 조롱과 비꼼과 유머로 버물린 이런 소설을 썼다고. 천잰가?
# 8.
이 책, 두껍다. 배게로 써도 높을 만큼. 게다가 중간중간 나오는 긴 대화는 저거 딴에는 진지할 지 몰라도 고양이와 나의 입장에서는 하찮다. 그래서 책을 몇 번이나 던졌다. 지루한 부분은 뛰어 넘어도 책을 읽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책을 아무렇게나 펼치고 거기서 시작해도 역시 지장이 없다. 그래야 정신 건강이 좋을 듯 하다.
# 9.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여느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늘 도도하고 날카롭게 인간의 하찮은 일들을 굽어 보던 고양이는, 인간이들이 남긴 술을 호기심으로 마시고 취해 독에 빠져 죽는다. 죽는 순간에도 고양이는 해학적이고 도도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식이다. 대가다운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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