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지만 결코 소소하지 않은 만화 : 정용연의 정가네 소사
오늘 짧은 만화 한 편을 끝냈다
역시나 힘들다
아무리 생각해도 쌩 노가다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품이 정말 많이 들어간다
보는 사람의 시선이 단 1초도 머무르지 않을 장면 하나를 위해
하루종일 매달린다
노동의 댓가가 제대로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별 수 없다 그저 팔자려니 해야한다나...
솔직히 이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이 번에 그린 만화 가운데 한 컷!
내 살던 청량리 시장을 상상해서 그렸다
그림을 그리다보니 징글징글하기만 하던 그곳이 그립더라 아니 그 때가 그립더라
울 엄니가 건강했고
돈도 꽤 벌었던
그래서 희망이란 놈이 굼실굼실 움트던 시절...
결국 울 아버지가 다 말아 먹었지만 어쨌든...
정용연
이 책 주인공의 아들이자 작가입니다. 책을 읽고 난 뒤 처음 들었던 느낌은 '허걱! 누가 이런 만화를 그렸지?' 입니다. 이런 정말 소소한 이야기를 소소하지 않게 그림으로 옮긴 이는 누굴까? 만화가 좋아서 떠돌다 떠돌다 결국 만화로 돌아온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자신의 가족사家族史를 만화로 그리면서 당당하게 바로 나의 가족사닷! 이라고 드러내 놓고 그리는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마우스를 몇번 굴렸더만..... 대봑~~~~ 바로 작가의 블로그를 발견했습니다. 블로그에는 작가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책 '정가네 소사'의 뒷 이야기까지..... 읽을 거리의 천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시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것은 달콤합니다. 덕분에 작가가 참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책의 이야기와 그림체에서 상상했던 이와 거의 비슷한 이미지입니다.
보는 사람의 시선이
단 1초도 머무르지 않을 장면 하나를 위해
하루종일 매달린다.
아 쒸바~~ 울컥 했습니다. 그림이 다시 보였습니다. 작가의 고독, 심정, 그런 것들이 딱 이 한문장으로 요약이 됩니다. 주제 넘은 말일 수도 있지만, 얼핏 정용연이라는 작가에 대해 묘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위의 사진과 글은 모두루라는 필명을 쓰는 저자의 블로그에서 인용했습니다.
1권 표지는 책의 주인공인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결혼 사진인 것 같습니다. 2권 표지는 당숙의 이발소구요, 3권 표지는 지아비를 잘 못만난 덕택으로(?) 지지리 고생을 한 여인 3대, 즉 외할머니와 그녀의 딸 어머니와 또 그녀의 딸인 누나입니다. 소박한 그림체도 마음에 듭니다. 잘 그린 그림이 아닌데 왜 그런지 자꾸 정이 갑니다. "꽃" 이라는 빨치산 이야기를 그린 박건웅 작가의 그림도 그렇더마....
의무병으로 제대하여 무면허 의사 노릇을 하기도 했고, 정부의 말을 믿고 누에고치를 하다 말아먹은 아버지 정동호와 그로 인해 날품과 좌판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 김정숙이 스토리를 이끌어 가지만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거의 대하소설 수준의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나름의 시대상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작가의 첫사랑? 이었던 청량리 오팔팔의 이름 모를 어느 여인까지.....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니, 에피소드 하나, 그림 하나에 작가의 정성과 애정이 그대로 닮겨 있습니다. 오죽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이야기를 완성하는데 꼬박 7년이 걸렸댑니다. 떠벌~~~ 책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그런 일을 7년이나 해온 작가에게 가슴에서 우러나는 박수를 보냅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 죽기 전에 '내가 이런 인생을 살았다' 라는 것은 무엇으로 남을까요? 혹은 죽고 나서 나의 자식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요? 살아온 흔적을 남기는 것, 바로 글쓰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더우기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두고두고 볼 수 있다면, 그건 돈으로 매길 수 없는 무엇보다 값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은 가족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살아온 우리의 역사입니다. 작가의 의도였던 아니던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아온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를 거쳐 지금에 왔습니다. 그런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그래서 지금을 사는 내가 있습니다.
하도 재미있게 보고 있으니 아내가 무슨 책인데? 라고 관심을 보입니다. 이러저러한 책이다 라고 이야기를 해주니, 우리 집안의 파란 만장한 내력을 잘 알고 있는 아내는 웃으면서 아주 제대로 비꼽니다. "당신도 함 써보지..... 제목은 김가네 대사다 대사!!!"
PS.
중학교 1학년 아들래미에게 함 읽어봐라고 줬더마 열페이지를 못 읽고 손을 듭니다.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 읽기엔 재미가 없습니다. 재미보다는 잔잔한 여운이 남는 책입니다. 책의 뒷편을 보니 처음 나온게 2012년 7월 인데, 3년이 넘은 지금에도 여전히 1쇄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하긴 나도 지금에서야 봤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이 부족한 우리나라 만화에 참 보석같은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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