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근 <산다> 2024
엄경근 <굴레> 2024
엄경근 <꽃마을 - 마을버스 막차> 2024
엄경근 2024 (이 그림과 함께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가 게시됨)
엄경근 <달동네 크리스마스> 2023
엄경근 <간디고등학교 풍경> 2023
그림을 그리는 아이에게
미술실 뒷통수를 자처한 아이.
미술 교사인 나보다 더 오래 미술실을 지키는 아이.
뭘 그렇게 열심히 만들고 그리는지,
한번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을 일어설 줄 모른다.
강제가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집중의 시간임을 알기에
혹여 내가 그 흐름을 깨진 않을까, 발걸음도 조심스러웠다.
무엇을 그렸나, 얼마나 잘 그렸나 하는 궁금증보다,
집중하는 그 모습 자체가 예뻐서
훔쳐보는 내내 뿌듯하고 가슴 벅차기도,
때로는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보다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오늘의 미술 교육 현주소를 고민하게 한 아이.
참나무가 될 도토리처험 이 아이에게 이미 힘이 있을거라고,
그 힘이 증폭될 수 있으려면 나부터 내가 가진 틀을 벗어야 했다.
지난 1년의 시간동안 행동으로 보여주고 작품으로 증명한 아이.
나에겐 스승같은 아이.
꽃길만 있지 않을 거라,
너는 흔들릴 것이고,
좌절할 것이고,
크나큰 벽에 부딪힐 때도 있을 것이라.
부디 휩쓸리지 말고
스스로의 힘으로 믿고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생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을 잊지 않길 바란다.
또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는,
가슴 뛰는 삶을 응원한다.
간디고등학교 미술교사 엄 경 근
(글 및 그림 출처 : 엄경근 페이스북)
경근쌤 페이스북을 쭉 보다 이 글을 읽고 눈물이 왁칵 흘렀습니다. 한번 터진 눈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 30분을 꺽꺽거리며 울고 나서도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이런 선생님인데....
부고를 받은 건, 어제 아침이었습니다. 보고 또 다시 봐도 본인 부고였습니다. 무슨 이런 날벼락이. 부고장을 자세히 보니 아이가 넷입니다. 하이고. 오전 내내 여러 학부모와 통화를 하고, 화환을 보내고, 선생님의 변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녁에 장례식장에 가보니, 이런 난리통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밀려오고, 빈소는 좁고, 울음 바다에, 마지막 밥은 먹어야겠고. 간디 학생들이 많이 왔습니다. 재학생 뿐만 아니라 경근샘과 같이 시간을 보낸 졸업생들도 참 많이 왔습니다. 학부모들도 학생 못지 않게 왔습니다. 겨우 울음을 참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산이가 3학년 때 경근쌤이 간디로 오셨습니다. 멋진 지프차를 타고서요. 2021년에 간디고등학교 공간혁신으로 설계를 하고 샘과 함께 인테리어 색상을 정하기도 했고, 2023년 간디학교 운동장 설계 때는 미술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진행하면서 여러모로 도와주셨습니다. 올해는 간디 25기의 모든 학생의 그림을 그려주시기도 했습니다. SNS에 그 그림들이 올라와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가끔 간디학교의 일상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올려주셨는데 예술가의 감성이 담겨 있습니다.
선생님의 페이스북을 보니 참 열심히 열심히 사셨더군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작품도 그리고, 엄살롱도 따로 운영하고, 이걸 어찌 다하나 할 정도로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주셨는데, 참 어찌 이리 가실까요. 삶이 고달파도 살아야지요. 바위를 안고 힘겨운 걸음을 걷는 그림에 <산다>라는 제목도 붙여놓고선. 당신과 인연을 맺은 수많은 사람들은 어찌하라고. 이런 무정한 사람같으니라고.
그런데 어쩌면, 조금 빨리 간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경근쌤도 예술가의 감성을 유지하기 위해 남들보다 좀 더 충동적으로, 좀 더 예민하게 삶을 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그랬겠지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나타났던 진짜 어른들처럼 나도 이제는 깜깜한 밤을 비춰줄 낮달을 그려 놓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래서 그 어두운 계단의 아이들을 안아주고 싶다. 직접 산타가 되어 선물을 고루 안겨주고 싶다. (247쪽)
이 책은 2021년에 나온 경근쌤의 에세이입니다. 부산의 달동네에서 태어나 가난과 소외로 문제아가 되었지만, 한 스승을 만나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된 한 청년의 성장기이자, 어렸을 적 아프지만 따뜻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회고담입니다. 쌤의 달동네 그림과 달동네 감성이 실려 있습니다. 고단했지만 온기가 있고, 힘겨웠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우리 이야기입니다.
장례식장을 다녀온 간디고 21기 아이들이 우리집에 다 모였습니다.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던 홍세현이 컵에다 쌤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위의 사진입니다. 우리 딸이 기타 치는 그림도 그려주셨는데, 몇 년째 냉장고에 잘 붙어 있습니다. 들이는 장례식장에 오지 못해 맘이 많이 아프다고 합니다. 다른 아이들도 말은 안하지만, 무거운 상실감이 얼굴에 묻어납니다.
함께 늙어갈 줄 알았는데, 쌤만 청년으로 남겠군요. 진짜 어른이 되고 싶다고 책에 쓰셨지만, 이미 진짜 어른입니다. 참으로 많은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존재로 인해 위안을 얻은 이들은 긴 시간을 아파하며 당신을 회상할 겁니다. 오래 기억할게요.
부디 아픔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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