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지 않고 재미있는 과학입니다만 : 이정모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 1.
뇌줄기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멜라토닌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는 것이다. 멜라토닌은 낮에 햇빛을 받아야 만들어지고 밤에 분비된다. 수십만 년 전의 원시인들은 해가 지자마자 멜라토닌이 분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로 올수록 멜라토닌 분비시간이 점차 늦어졌다. 특히 사춘기가 되면 대개 밤 11시쯤부터 분비되기 시작해서 아침 9시가 지나도록 남아있다.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시간이 더 늦어진다. 게으르거나 게임과 핸드폰에 빠져서가 아니라 청소년들에게는 원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생리적인 사이클이 있는 것이다. (p.31)
이거 우리 아이들이 읽으면 굉장히 좋아하겠는걸. 주말 아침에 아이들 밥 먹으라고 깨우는 날 보고 자게 좀 놔 둬 라고 핀잔을 주는 아내는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가. 현명한 아내! 지식이 많다고 결코 슬기로운 게 아니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는다.
# 2.
2016년 4월 유발 하라리 교수는 서울시청 8층에 와서 짧은 강연 후 박원순 시장과 북토크를 나누었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는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일이나 해야 하며 그 일마저 나중에는 인공지능이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때 박원순 시장은 한 고위간부를 향해 "앞으로 인공지능이 다 한다는데 그러면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나요"라고 의견을 물었다. 그 간부는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노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p.48)
나도 놀 줄 모르는 인간이다. 그렇다고 일만 하는 인간은 더더욱 아니다.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거의 모든 분야를 기웃거렸으며 애착을 가지고 즐기기도 했지만 더 이상 그것들이 재미있지 않았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더 이상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 뒤로 혼자 하는 활동에 물들었다. 뜀박질, 바둑, 책읽기, 글쓰기 등. 아내는 이런 나를 재미없는 잉간이라고 놀리지만 어쩌면 나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거라고 느낀다. 근데 AI도 책 읽고 글 쓰려나?
# 3.
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수컷은 암컷을 꼬시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부질없는 짓이다. 지구에 살고 있는 수컷 가운데 죽기 전에 암컷 곁에 한번이라도 가본 개체는 전체 수컷 가운데 4%에 불과하다. 나머지 96%의 수컷은 평생 짝짓기 한 번 못해보고 생을 마감한다. 여기에 비하면 인간 남성은 정말로 복 받은 존재다. (p.221)
이런! 이 사실은 우리 마눌은 몰라야 하는데. 안그래도 지금은 부부사이에 만유인력이 전혀 작용을 안해서, 작용을 안하기는 커녕 서로 밀어내는 만유추력이 작용하는 시점인데. 그래서 짝짓기라도 함 할라치면 온갖 알랑방구와 청소며 설겆이 같은 갖은 집안일을 해야 허하심을 할똥말똥인데.....
# 4.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인공지능이 100년 안에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다. 터무니없는 얘기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긴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 인공지능은 이미 IT 분야를 뛰어넘어서 과학, 의학, 예술, 언론, 상담 및 상업 분야로 진출하여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공지능과 대화를 하고 인공지능의 혜택을 받고 있다. 앞으로 인공지능은 인간하을 지루고 힘든 노동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다.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들이 1년 내내 24시간 쉬지 않고 일할 것이다. (p.287)
이정모 관장은 AI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몰락을 불러온다고 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기본소득제'를 주장한다. 기본소득이란 국가가 모든 시민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급하는 소득을 말한다. 재산의 유무나 소득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평생동안 충분한 금액을 지급한다는 이 개념은 '4차 산업혁명'으로 발생하는 구조적인 일자리 감소에 대한 대안으로 논의가 되고 있고 선진국 및 일부 나라에서 이미 시험 가동 중이다. 아무것도 안해도 살만큼 충분한 돈을 나라에서 준다고? 그럼 진짜로 일이 취미가 되겠군. 솔깃하다.
과학이 진리가 된 세상이다. 과학적 사실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에는 신화가, 그 후엔 철학이, 그리고 종교가 오랫동안 그 지위를 누렸으나 지금은 명확히 과학의 시대다. 그렇긴 하지만, 과학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이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공학을 전공하고 그걸로 밥 먹고 사는 나로서는 슬픈 사실이다. 지금은 인문학이 개인을 행복으로 이끌어줄 대안으로 서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서점에 가면 온통 인문학책 투성이다. 그렇기에 전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이자 맘씨 좋은 털보 과학자 아저씨가 쓴 이 책은 그 희소성으로 빛이 난다.
일단 재미있다. 과학적으로 알려주니 절로 수긍이 간다. '그렇지, 그런 거였지' 하며 물개 박수를 친다. 북극 빙산의 대부분은 물에 잠겨있기에 그 빙산이 다 녹아도 해수면은 고작 1mm 상승한다든지, 전자렌지에서 나오는 전자파가 인체에 해로운 정도가 김치 정도의 수준이라든지, 미구라지가 흙탕물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더러운 물에서도 버티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라든지, 처방 받은 약을 내성이 생길까봐 다 먹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실은 그렇기에 내성이 생기는 거라든지, 사대강 사업에 투자한 돈이면 망갈리안 이라는 우주선을 300대 정도는 쏘아 올렸을 터이고,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화성을 이미 탐사했을지도 모른다든지, 한국 사람이 금메달을 딴 걸 자랑하자 나치시대에 독일 사람들도 그랬다며 올림픽은 국가적인 대사라기 보다 최선을 다한 선수들의 잔치라고 했던 독일 할머니 이야기를 이야기를 읽으면 그렇다. 아, 과학자의 시선이란 현상을 이렇게 해석하는구나.
관장님은 과학이 어떻게든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본인이 여러 활동과 기고를 하시기도 하고. 또한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이다. 과학으로 시작한 글이 항상 정치로 끝날 때가 많다. 처음에는 와~ 했는데 대부분의 글이 그렇다보니 좀 식상하기도 했다. 글을 쓴 시기가 이전 정권의 몸부림이 극에 달했을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지만 과학자도 이 사회의 현상에 대해 충분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고, 또 그런 이가 실로 많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된다. 재미있는 건 사회 비판도 과학적으로 하신다. 그러니 읽으면서 설득당할 수 밖에.
책 표지의 뜀틀을 넘고 계시는 냥반이 저자인데, 강연에 나오는 관장님을 땅딸한 모습을 보니 표지 그림은 희망사항이 아닌가 싶다. 근데 실제 그의 강연과 글은 저 표지 그림처럼 유쾌하고 소탈하다.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이라는 제목이지만 '전혀 어렵지 않고 재미있습니다' 라고 책은 말한다. 과학을 진정 좋아하고 즐기는 과학자를 만날 좋은 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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