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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이야기

공부의 절대고수 되기 : 고미숙의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by Keaton Kim 2016. 5. 8.

 

 

 

공부의 절대고수 되기 : 고미숙의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1. 코뮌

 

 

조선 후기 지성사의 새로운 장을 연 연암그룹 역시 이런 식의 코뮌이었다. 거기서는 신분도, 직업도, 나이도, 당파도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천하고금의 이치에서 수레와 벽돌의 원리 같은 구체적인 지식에 이르기까지, 생사를 넘는 도의 경지와 '지금, 여기'를 사유하는 현실주의가 동시적으로 탐구되었다. 연암의 빛나는 사유는 바로 이 창발적 네트워크의 산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근대 이전, 배움터란 기본적으로 '코뮌(Commune)'이었다.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 코뮌이란 기성의 권력과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스승을 만난다는 건 바로 그 코뮌에 접속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왜 그토록 스승을 찾아 해매었던가? 스승을 만나야만, 그 '코뮌'에 접속해야만, 지리멸렬하던 공부가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p.89)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는 무공비급을 전수해 줄 스승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같이 동문수학할 '코뮌'은 어디가면 만날 수 있을까? 찾고는 있나?

 

 

 

2. 글쓰기

 

 

한 일간지 기자가 내게 물었다. "어떤 글을 쓰고 싶으세요?" 좀 어뚱한 질문이긴 했지만, 나는 즉시 이렇게 대답했다. "글이 참 재미있네, 혹은 이 사람 역시 훌륭해! 이런 평가는 받고 싶지 않아요. 내 글을 읽고 나서 단 한 사람이라도 지금까지와는 좀 다르게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참 좋겠어요." 그렇다. 생각의 지도를 변경하고 삶의 행로를 바꿀 수 있는 글, 그것이 내가 꿈꾸는 글쓰기의 지평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글을 쓰는 자 자신이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 (p.143)

 

다른 사람이 나의 글을 읽고 삶이 바뀌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내가 나의 글을 읽고 나의 삶이 바뀔 정도의 글이면 충분하다. 바뀌고 있나?

 

 

 

 

 

 

 

3. 고전

 

 

고전이란 시대의 통념과 억압을 뚫고 삶과 사유의 눈부신 비전을 탐색한 전위적 텍스트를 말한다. 고전이 시대마다 서로 다른 의미망을 구성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전위적 열정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이야말로 진정, '미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미래란 '아직 오지 않았지만[未], 곧 도래할[來]'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고전이 바로 그렇다. 그것은 늘 우리에게 도래할 시간에 대해 예고해 준다. 오래된 미래로서의 고전! 고전의 전위성에서 머지않아 '지금, 여기'로 도래할 삶의 지혜와 비전을 길어 올릴 것. (p.85)

 

고전이 고리타분하다고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나는 고리타분한 인간인가? 고전을 알면 미래가 보인다고? 미래를 예언하는 그런 고전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나?

 

 

 

 4. 에피쿠로스

 

 

 

"너는 무엇을 먹고 마실까보다도 누구와 먹고 마실까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친구 없이 고기를 먹는 것은 사자나 늑대의 삶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이 말에 걸맞는 삶을 살았다. 그가 연 정원의 학교에는 노예, 노인, 어린이, 매춘 여성 등 당시 사회의 소수자들이 함께 생활했다. (p.154)

 

 

오늘도 무엇을 먹고 마실까에 대해 고민한다. 누구랑 같이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그래도 누구랑 먹고 마실까에 대해 고민하자.

 

 

 

이탈리아의 화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는 작품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으로 바티칸 궁에 있다고 하는데요, 엥간한 그리스의 철학자와 예술가는 여기 다 나온다고 합니다. 가운데 있는 두분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구요, 소크라테스와 알렉산드 대왕,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디오게네스, 심지어 히파티아도 등장합니다. 물론 '쾌락'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도 여기 나옵니다. 한번 찾아보셔요. 호모 쿵푸스에도 이 그림이 나오는데요, 책에서 가르키는 이와 아래 블로그에서 에피쿠로스라고 가르키는 이가 다르네요. 찾기가 쉽진 않군요....ㅎㅎ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gold9055/15014510

 

 

 

5. 배움

 

 

배움에 있어 가장 불리한 조건은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 혹은 이미 획득한 지식에 갇혀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성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양이 많건 적건 '비움'은 배움의 필수적 조건이다. 끊임없이 비울 수 있어야 더 큰 앎이 흘러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p.140)

 

배우기 위해 나를 비운다..... 어떻게???

 

 

 

6. 공부

 

 

공부는 마땅히 학교를 마친 다음에 더 열심히 해야 한다. 학교에 다닐 때, 미성년기에 안 하는 건 그래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인이 된 후에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치명적이다. 성인이 되기 전엔 삶을 깊이 있게 통찰할 기회가 별로 없지만,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누구나 경험의 편폭이 넓어지게 마련이다. 아이를 낳고, 부모님이나 친지가 세상을 떠나고, 생업의 전선을 누비며 산전수전을 겪는 등, '생로병사'가 목전에서 입체적을 펼쳐지게 된다. 그것들을 지혜롭게 통과해 나가려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 (p.38)

 

마땅히 그러하다. 초등학교 보다는 중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잘 해야한다. 중학교보다는 고등하교, 고등학교보다는 대학교,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가 더 열심히 해야한다. 그러면 그 공부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우주 유일의 고전 평론가라는 닉네임이 어울리는 저자입니다. 서사연의 박태호 교수 (필명 이진경)와 함께 연구공동체 <수유+너머>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남산자락의 <감이당> 당주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책도 무지 많이 쓰셨습니다. 문체가 단호합니다. 저자의 주장에 아니라고 하면 종아리라도 걷을 기세입니다. 꿈꾸던 '열린 광장'에서 마음껏 공부하고 무엇보다 인문학 공동체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직접 실천하고 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7. 율곡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학자인 율곡 이이는 평소 공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격몽요결擊蒙要訣] 이라는 책으로 펴냈는데, 이 책은 인조 때에 각 도의 향교에서 교과서로 쓰이기도 했다. 그 한 구절을 들어보자. "공부라는 것은 일상생활과 일 속에 있다. 평소에 행동을 공손히 하고 일을 공경히 하며, 남에게 진실되게 대하는 것, 이것이 곧 공부라 할 수 있다. 책을 읽는 것은 이 이치를 밝히고자 해서이다." 요컨대 공부는 현학적인 것, 높고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일상에 있다는 것. (p.80)

 

공부의 정의가 진실로 이러하다면, 우리는 얼마나 공부를 제대로 했는가? 공부의 정의는 진실로 이러해야 한다. 행동을 공손히, 일을 공경히, 남에게 진실되게!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나!

 

 

 

8. 호모 쿵푸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 소외와의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책을 읽고, 삶을 조직하고, 천하를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주자가 말했듯이, "부귀하면 부귀한 대로 공부할 일이요, 빈천하다면 빈천한 대로 공부할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땅의 청소년들이야말로 가장 억압적이면서 가장 소외된 계급에 해당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입시를 위한 전쟁터에 내몰리고 거짓된 표상의 덫에 걸려 청춘을 다 바쳐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억압과 소외의 사슬을 끊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자기가 발 딛고 있는 곳을 배움터의 배치로 바꾸고, 지식의 향연을 구가하는 학습망을 조직할 것. 즉, 청춘의 패기와 열정을 모아 지식의 노예가 아니라 지식을 통해 자유는 누리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요컨대 스스로가 '호모 쿵푸스'임을 자각해야 한다. (p.211)

 

절대 고수, 호모 쿵푸스. 쿵후의 달인이 아니라 공부의 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