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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야기45

스위스 시골 마을의 작은 벤치가 생각납니다 : 나희덕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이 산문집에 바람의 이야기와 텅 빈 벤치 사진이 나옵니다. 그 사진을 본 순간 스위스 여행이 떠올랐습니다. 5년 동안 한번도 기억에 올린 적이 없던 장면이 머리 속에 나타난 겁니다. 참 이상하지요, 어떤 메카니즘이 기억 저 편에 있던 그 장면을 불러왔을까요? 그래서 유럽 여행의 사진을 오랜만에 다시 찾아봤습니다. 위의 사진입니다. 숨비츠라는 작은 마을에 여행자를 위한 벤치와 그 벤치에서 앉아 본 풍경입니다.   페터 춤토르의 성 베네틱트 교회는 스위스의 숨비츠에 있습니다. 거의 숨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전 건축 공부를 할 때 사진을 보고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맘 먹었더랬습니다. 밀라노에서 새벽에 출발해서 기차를 다섯 번이나 갈아타고 무인역인 숨비츠에 내려 한참을 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2024. 11. 16.
붕어빵 장사를 시작한 아들을 응원하며 : 이병곤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기> - 아빠, 나 붕어빵 장사 해볼까요?- 응? 웬 붕어빵?  산이가 붕어빵 얘길 하길래 뒤통수로 들었습니다. 붕어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뭐 이런 거였죠. 근데 지 나름대로 뭔가 사부작사부작 준비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아침에 뒤통수에 대고 "아빠, 오늘부터 장사 시작해요." 하고 한마디를 날리는 거였습니다. 진짜 한다고? 오후 두 시에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일하는 내내 신경이 쓰였습니다. 밤 열 시쯤 퇴근하면서 가보았습니다. 붕어빵을 굽는 아들을 보니 하~ 진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좁디 좁은 공간에서 여덟 시간을 내내 서서 일을 했을 아들을 생각하니 맘이 아팠습니다.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 재미있댑니다. 하! 그제서야.. 2024. 11. 12.
경근쌤, 부디 잘 가셔요 : 엄경근 <산복도로 오딧세이아> 엄경근 2024  엄경근 2024  엄경근 2024  엄경근 2024 (이 그림과 함께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가 게시됨)  엄경근 2023  엄경근 2023  그림을 그리는 아이에게 미술실 뒷통수를 자처한 아이.미술 교사인 나보다 더 오래 미술실을 지키는 아이.뭘 그렇게 열심히 만들고 그리는지,한번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을 일어설 줄 모른다. 강제가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집중의 시간임을 알기에혹여 내가 그 흐름을 깨진 않을까, 발걸음도 조심스러웠다. 무엇을 그렸나, 얼마나 잘 그렸나 하는 궁금증보다,집중하는 그 모습 자체가 예뻐서훔쳐보는 내내 뿌듯하고 가슴 벅차기도,때로는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보다'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오늘의 미술 교육 현주소를 고민하.. 2024. 11. 9.
클랩함 정션으로 가는 길 : 림태주 <관계의 물리학> 문명을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진화하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세상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본다. 공부가 배움을 잃고, 만남이 사귐을 잃고, 노동이 땀을 잃고, 삶이 쓸모를 잃어가는 세상이 결코 진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53쪽)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싶다면, 내 성격이 어떤가를 남들에게 묻기보다 내 혀가 어떤 말을 주로 내뱉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봐야 한다.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기를 원하다면, 성격이 아니라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고 말하는 태도를 바꾸면 된다. 성격은 바꾸기 힘들지만 말의 색채는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선택하고 바꿀 수 있다. (80쪽) 누구나 삶을 견디며 산다. 동정할 까닭도 값싼 위로를 건낼 이유도 없다. 오래 견디면 견디고 산다는 걸 잊게 된다. 견디.. 2024. 10. 3.
늙기의 즐거움, 늙기의 자연스러움, 늙기의 두려움 : 김훈 <허송세월>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병원에 가셨는데, 오빠야 니가 좀 가봐야 될 것 같다." 동생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고, 나는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진료실 앞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아버지, 아버지, 진료는 보셨어요?" 하며 깨웠고, 아버지는 의사를 만났는지 안만났는지도 모르겠다고 어눌하게 말씀하셨다. 혹시 몰라 1층 접수에 가니 이미 접수는 했다고 한다. 담당 간호사에게 다가가 어찌 된 일이냐고, 의사를 뵐 수 있냐고 물었다. 간호사는 진료는 봤고, 아마도 부정맥이 원인인 것 같으니, 부정맥으로 다니던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근수 내과에서 간호사가 모시고 왔다고 했다. 요약하면 몸이 좋지 않아 근처 내.. 2024. 9. 21.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 류이치 사카모토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요즘 도마의 이라는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강이가 혼자 기타를 치며 부르고 있길래 물어보니 이 노래라고 합니다. 노래가 경쾌하고 특히 아들 녀석이 맛깔나게 부르니 더 멋져 보입니다. 듣다보니 좋은 건 멜로디 뿐만이 아닙니다.  슬픔은 저어기 골목 끝까지 갔다가 내가 부르면 다시 달려오고슬픔은 저어기 시장통에 구경 갔다가 밥 짓는 냄새에 돌아오지 밥 짓는 냄새에 돌아오는 슬픔이라, 어쩜 이리 감성적인 가사를 쉬이 만들었을까요? 나이도 엣되어 보이는데요. 그런데, 벌써 오래 전에 고인이 되었다네요. 헐, 이 피지 못한 청춘을 어찌 할까요. CTR사운드에 가면 도마의 서약서가 있댑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2집을 마무리할 것이라는 내용으로요. 그런데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남은 절친.. 2024. 9. 17.
이러다 곧 온다 : 실버 센류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종이랑 펜찾는 사이에쓸 말 까먹네 야마모토 류소. 남성. 지바현. 일흔세 살. 무직 (p.9)  일어나긴 했는데잘 때까지 딱히 할 일이 없다 요시무라 아키히로. 남성. 사이타마현. 일흔세 살. 무직 (p.17)  자명종 울리려면 멀었나일어나서 기다린다 야마다 히로마사. 남성. 가나가와현. 일흔한 살. 경영 컨설턴트 (p.19)  연명 치료 필요없다 써놓고매일 병원 다닌다 우루이치 다카미쓰. 남성. 미야기현. 일흔 살. 무직 (p.20)  "연세가 많으셔서요"그게 병명이냐 시골 의사여 마쓰우라 히로시. 남성. 지바현. 여든세 살. 무직 (p.50)  손주 목소리부부 둘이서수화기에 뺨을 맞댄다 나카쿠보 시로. 남성. 히로시마현. 일흔여섯 살. 무직 (p.72)  무농약에 집착하면서내복약에 절어 산다 나카타니.. 2024. 9. 3.
형편없이 살고 있는 나에게 : 이병률 <내 옆에 있는 사람> 친구 갑수는 지 입으로 울나라 3대 여행작가라고 했다. 그렇게 우기니 아니라고는 안했다. 대신 나머지 두 명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지도 모른댄다. 고3 시절 갑수랑 한 반이었는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갑수는 교실 뒤에서 장정일의 야한 소설을 읽었다. 자연반도 아닌데 국문과를 간다고 선생님께 혼나기도 했다. 그렇게 국문과를 갔다. 몇 년이 지나고 갑수의 시집이 나왔다. 그러고 또 몇 년이 지나고 여행책이 나왔다. 그 뒤로 줄줄이 책이 나왔다. 여행을 다니고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그걸로 밥벌이를 한다. 이보다 더 행복한 직업이 있을까? 다른 친구들을 만날 때마나 우리 동기들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친구라고 갑수를 자랑했다. 내 옆에 있는 사람 이 사실을 알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지 .. 2021. 7. 17.
시가 쉬워졌어요 : 이문재 <혼자의 넓이> 철인삼종경기 내가 하도 학교, 새로운 학교 하니까 대체 어떤 학교를 만들고 싶은 것이냐고 물어오는데요, 그때마다 다음과 같이 짧게 답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악기 연주, 음식 만들기, 스포츠 활동 이 세가지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돕는, 학교 같지 않은 학교를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악기를 다룰 줄 알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자기 감정을 에둘러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들과도 쉽게 교감할 수 있습니다. 가령 하모니카를 잘 부는 소년이라면 중남미 고산지대나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 가서도 금세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겁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음악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음식 만들기도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자기 혼자 먹는 음식에 정성을 다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준.. 2021. 6. 8.
내 인생을 지배한 열정은 무엇인가 : 김수영 <김수영 전집 2 산문> 내 인생을 지배한 열정은 무엇인가 : 김수영 단순하지만 매우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했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 추구, 인간의 고통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연민이 그것이다. 이 열정들은 마치 거센 바람처럼 나를 이리저리로, 고뇌의 깊은 바다로, 절망의 벼랑으로 휘몰았다. 내가 사랑을 추구한 첫 번째 이유는 사랑이 주는 황홀함 때문이다. 그 황홀함은 너무도 큰 것이어서 그 환희의 몇 시간을 위해서라면 나머지 인생을 모두 바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내가 사랑을 추구한 그 다음 이유는 사랑이 외로움을 덜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외로움 속에서 인간의 의식은 몸서리치며 세상의 가장자리 너머 차갑고 측량할 수 없는 죽음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내가 사랑을 추구한 마지막 이유는 사랑의 합일 속.. 2020. 8. 6.
아내와 함께 강연을 다니는 저자 : 이국환 <오전을 사는 이에게 오후도 미래다> 아내와 함께 강연을 다니는 저자 : 이국환 내가 들은 인생 조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친정어머니가 시집간 딸에게 해주는 말이었다. 탁자가 서너 개에 불과한 국밥을 파는 작은 식당이었다. 무람없이 밥을 먹는 딸의 표정은 어두웠고, 심각한 고민으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듯했다. 친정어머니는 천천히 국물을 뜨며 묵묵히 딸의 말을 듣기만 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어머니가 나직하게 말했다. "인생 살아보니 짧더라. 너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라." 어머니의 조언은 짧고 명료했다. 문득 돌아본 어머니의 담담한 말투보다 회한에 찬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는 정작 후회 없이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았을까? (p.22) 위의 글은 편에 나온다. 여기에서는 니체의 글을 인용하여 인생을 낙타.. 2020. 6. 28.
동네 책방 특별 한정판이래 : 이미경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 동네 책방 특별 한정판이래 : 이미경 "동네 서점용 특별 한정판 주문 받습니다." 동네 책방인 책방지기님한테서 카톡이 날라왔습니다. 동네 서점용 특별 한정판?? 아, 이런 거에 약합니다. 바로 주문합니다. 이틀 후에 오면 책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주문하고 까먹고 있다 오늘 책방에 들렀습니다. 책방지기님이 책방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택가 가운데 있는 고즈넉한 책방과 청소하는 책방지기님의 모습이 어디선가 본 듯한 명화의 한 장면입니다. 예전의 책 은 사서로 있던 지인이 책을 빌려주어 읽었습니다. 돌려주기 아까와서 한 동안 우리집 책장에 꽂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살 기회를 잃었었죠. 이런 책은 집에 두고 천천히 보면 좋겠다 싶었는데, 이번에 새 책이 나왔다니 안 살 수가 없습니다. 책을 공방으.. 2020. 6. 17.
솔로거나 나같이 솔로와 다름없는 이는 읽지 마라 : 장강명 <5년 만에 신혼여행> 솔로거나 나같이 솔로와 다름없는 이는 읽지 마라 : 장강명 아아, 좀 비키세요. 니가, 어, 이런 거 봐도 되는 나이가? 아아, 이거 제일 중요한 장면이란 말이에요. 니 열여덟 살 아이가. 아, 진짜. 방해하지 마세요. 아, 방해하지 말라고요~ 안된다. 이거 보믄 안된다. 열여덟은 안된다~~~ 아쒸, 오십 살 아빠! 쫌!! 안된다. 훌랄라~~ 안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익순이와 준완이가 뽀뽀하는 장면에서 내가 테레비를 막아선다. 딸은 뒤에서 아쒸~를 연발하며 왼쪽 오른쪽으로 고개를 내민다. 그럴 때마다 나는 춤을 추며 더 막는다. 장면이 지나가고 딸은 무지 아쉬워한다. 들이야, 엄마 아빠도 옛날엔 저랬다. 흐으으~~ 근데 결혼 19년이 되면 이래 된다. 좀 잘하지 그랬어요? 잘했으니까 엄마랑 결혼했지.. 2020. 5. 23.
쓸모를 다해 버려졌거나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쓴다 : 이기주 <언어의 온도> 쓸모를 다해 버려졌거나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쓴다 : 이기주 1. 극지에 사는 이누이트들은 분노를 현명하게 다스린다. 아니 놓아준다. 그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언제까지? 분노의 감정이 스스륵 가라앉을 때까지. 그리고 충분히 멀리 왔다 싶으면 그 자리에 긴 막대기 하나를 꽂아두고 온다. 미움, 원망, 서러움으로 얽히고 설킨,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지도 모르는 지나치게 뜨거운 감정을 그곳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것이다. (p.231) 2. 어쩌면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도착'이 아니라 '과정'인지 모른다. 그래서 난 장거리 이동을 할 대 비행기보다는 열차에 몸을 싣는 편이다. 기차를 타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찬찬히 응시할 수 있다. 이동의 과정을 음미하면서 멀어.. 2020. 5. 18.
네가 나를 밀어내 슬프다. 대신 안아주면 안될까? : 김선희 <내 남자 안아주기> 네가 나를 밀어내 슬프다. 대신 안아주면 안될까? : 김선희 나 : 들아, 아빠 또 외국에 나갈까? 딸 : 왜여? 일자리가 있어여? 아내 : 지발 쫌 가라. 인자 도저히 같이 못 살겠다. 나 : 니 그럴 줄 알았다. 니가 그래서 더 집에 딱 붙어 있을끼다. 아내 : 돈 벌러 안가나. 인제 출근 쫌 하지. 나 : 집에서 노니까 좋은데 왜. 아내 : 쫌 나가라. 그리고 안 들어와도 된다. 양육비만 부치고. 나 : 고렇게는 못하지. 아내 : 그라먼 내가 가출 할란다. 나 : 어이구, 네, 잘 가시오. 아내 : 가출하면 어째 되는지 아나? 나 : 우째 되는데? 집에 안들어오나? 아내 : 당연하지. 내 찾을 생각 마라. 나 : 안 찾는다. 걱정 마라. 그라믄 나도 해방이다. 아내 : 그래. 그라자. 나도 다른 남.. 2020. 3. 29.
사랑만 하고 살아도 모자란 날들 : 강창래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사랑만 하고 살아도 모자란 날들 : 강창래 눈을 뜬다. 조용하다. 냉장고를 열어 매실물 한잔 마신다. 정신이 좀 든다. 방방마다 문을 열어본다. 큰넘은 반듯하게 잔다. 이불도 목까지 덥고서. 딸아이는 지 방 구석에 웅크리고 잔다. 분명 가운데서 잤을 텐데. 크고 예쁜 고양이다. 막내는 엄마와 엉켜서 자고 있다. 냉장고를 연다. 홈쇼핑에서 주문한 오징어가 있다. 오늘 아점은 오징어 볶음이다. 냉동된 오징어 두 마리를 흐르는 물에 녹이고 먹기 좋게 썬다. 껍질을 벗기면 더 부드럽다고 하나 귀찮다. 양념장을 만든다. 고추장, 고추가루, 땡초, 마늘, 설탕, 간장, 맛술, 참기름을 넣고 저어준다. 또 뭐 넣을 거 없나? 먹다 남은 와인과 매실액이 보인다. 마저 넣고 오징어를 투하해서 버무린다. 잠깐 재워둔다. .. 2020. 3. 22.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긍정을 바라지도 않는다 : 김훈 <연필로 쓰기>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긍정을 바라지도 않는다 : 김훈 늙어서 슬픈 일이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못 견딜 일은 젊어서 저지른 온갖 못된 짓거리와 비루한 삶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 어리석은 짓, 해서는 안 될 짓, 함부로 써낸 글, 너무 빨리 움직인 혓바닥, 몽매한 자만심, 무의미한 싸움들, 지겨운 밥벌이, 계속되는 야근과 야만적 중노동..... 이런 기억이 물고 오는 슬픔은 뉘우침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한恨이나 자책일 뿐이다. 그 쓰라림은 때때로 비수를 지른다. 아아, 나는 어쩌자고 그랬던가. 그때는 왜 그 잘못을 몰랐던가. 이보다 더 슬픈 일은 그 악업과 몽매를 상쇄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미 없다는 것이다. 나는 절벽과 마주선다. 이런 회한과 절벽을 극복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그 .. 2020. 3. 2.
글을 쓰지 않으면 그냥 방송 건달일 뿐이다 : 허지웅 <버티는 삶에 관하여> 글을 쓰지 않으면 그냥 방송 건달일 뿐이다 : 허지웅 지인 : 허지웅 글 읽어 봤어? 나 : 아니. TV에 나오는 그 친구 별로던데. 쫌 이상해. 지인 : 아냐. 시간내서 함 읽어봐. 글은 완전 다른 모습이야. 나 : 그래? 그렇단 말이지. 몇 해 전에 함께 공부 모임을 하던 지인이 허지웅의 글을 추천했습니다. 당시 허지웅은 어느 TV 프로그램에 나왔는데 딱 봐도 뭔가 삐딱한 녀석이었습니다. 냉소적이고, 결벽증도 있는 것 같고. 보기에 별로였습니다. '젊은 녀석이 참 독특하네' 뭐, 그 정도.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영화 를 소개했습니다. 경기 전날 록키는 애인인 아드리안에 이런 말을 합니다. 시합에서 져도, 머리가 터져버려도 상관없어어. 15회까지 버티.. 2020. 2. 17.
아주 근사한 공간에서 아주 근사한 산문을 읽다 : 제수연 <나는 아직 멀었다> 아주 근사한 공간에서 아주 근사한 산문을 읽다 : 제수연 동네에 라고 하는 도서관이 생겼다는 소식을 꽤 오래전에 듣고선 이름이 참 예쁘고 잘 지어서 가봐야지 생각했더랬는데 이제서야 문득 생각이 납니다. 위치를 찾아봅니다. 엉? 주촌초등학교? 헐? 레알? 네, 그렇댑니다. 주촌초등학교가 대단지 아파트 앞으로 이전하고, 옛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서 도서관으로 만들었습니다. 누구 아이디언지 몰라도 너무 멋집니다. 그리고 저, 주촌국민학교 나왔습니다. 51회 전교 회장 출신이디. 데헷! 그래서 이제는 멋진 이름을 가진 도서관으로 변신한 나의 모교에 설레임을 안고 갔습니다. 도서관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했습니다. 이층에 있는 우아한 1인용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가지고 간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다 지겨.. 2020. 2. 3.
저, 퇴사했는데요 : 이나가키 에미코 <퇴사하겠습니다> 저, 퇴사했는데요 : 이나가키 에미코 행님, 회사 그만두면 아이들하고 형수님하고 생활비는 우짤건데? 나 : ..... 그라고 그만두고 나서 뭐 할낀데? 나 : ..... 무슨 생각이 있을 거 아이가? 그런 것도 없이 덜컥 그만둔기가? 나 : ..... "사표를 썼습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의 첫 반응은 역시 '일순 침묵'입니다. 얼굴을 보니 헐~~ 이라는 반응입니다. 왜? 라고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안됐다는 표정도 잠깐 나오고, 그랬구나 라는 표정을 짓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질문을 시작합니다. 누가 괴롭혔는지, 왜 그만두는지, 언제 그만두는지, 그만두고 뭐 할건지를 묻습니다. 일일이 대답하기가 뭐해서 그냥 대충 얼버무립니다. 퇴직을 하려면 회사의 면담(그만두는 마당에 면담은 무슨 면담을....)은 필수.. 2019. 5. 16.
그저 담담하게 털어놓은 그 남자의 일기장 : 이석원 <보통의 존재> 그저 담담하게 털어놓은 그 남자의 일기장 : 이석원 나는 손잡는 것을 좋아한다. 모르는 남녀가 거리낌 없이 하룻밤을 보내는 원나잇 스탠드가 요즘처럼 횡행하는 세상에서도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는 행위가 여전히 특별할 수 있다는 것. 그 느낌이 이렇게나 따뜻하고 애틋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눈물겹다. 잠시 잠깐 만난 사이에서는 결코 손을 잡고 영화를 보거나 거리를 걷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으니까. 손을 잡는다는 것은 그처럼 온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누구든 아무하고 잘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무하고나 손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손잡는 것이 좋다. (p.14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으면서' 중에서) "너는 커서 뭐가 될래?" 만약 지금 내게 누가 다시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살다보면 .. 2019. 3. 24.
이 아자씨, 역시 여전하시네 : 무라카미 류 <자살보다 SEX> 이 아자씨, 역시 여전하시네 : 무라카미 류 # 1. 기억하고 있어? 나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독립해서 싱가포르에 사무실을 열고 공사채 투자로 큰 돈벌이를 해보겠다고. 돈을 많이 벌게 될텐데, 그럼 당신은 뭘 하고 싶어? 라고. 달린저의 창녀 애인처럼 리카도 허풍 치는 나를 따스하게 바라보며 똑같은 말을 했지. "그래요, 다시 당신과 춤추고 싶어요."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오늘은 이만 쓸께. (p.15) # 2. 그렇다고 못생긴 여자가 팔리지 않고 대량으로 남겨졌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백화점이나 유원지에 가보면 "우와, 심하다!"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못생긴 여자들이 여봐란듯이 결혼해서 남편들과 아이를 데리고 다닌다. 못생긴 여자와 자는 남자도 있는 것이다. 남자에게는 미추에 앞서 우선 .. 2019. 2. 7.
도대체 이 누님, 상상력의 끝은 어디냐? : 요네하라 마리 <발명 마니아> 도대체 이 누님, 상상력의 끝은 어디냐? : 요네하라 마리 를 읽은 후에 일명 '마리 누님'의 책들이 궁금해서 서점에 어슬렁거리던 차에 발견한 책이다. 책 제목이 라 무슨 발명에 관한 책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두툼한 분량 전부가 이토록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자신의 발명품을 설명한 책인 줄은 몰랐다. 도대체 이 누님의 상상의 끝은 어디냐? 라고 혀를 내두르며 읽다보니 벌써 끝났다. 그녀의 머리 속에 잠깐 들어가볼까? 보자마자 이거다! 라고 생각했다. 나도 주로 누워서 책을 보는데, 이쪽으로 누웠다가 또 저쪽으로 눕기도 하고, 팔이 아파 엎드려 읽다가, 보통 그대로 잠든다. 누워서 읽기 좋게 책을 들어주고, "다음"이라고 말하면 페이지를 넘겨주며, 잠들라 치면 나의 몸을 흔들어주는 로봇을 생각하기도 했다. 이.. 2018. 11. 28.
열심히 살아도 될똥말똥 한 판에 : 하완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열심히 살아도 될똥말똥 한 판에 : 하완 "제목 함 봐라, 기가 막힌다! 열심히 해도 될똥말똥 한 판에 머시라?" 그러게 말입니다. 열심히 해도 안되는 세상인데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니요. 이건 열심히 살고 있고 또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욕?적인 말입니다. 책을 읽고 있는 나를 힐끔거리더니 아내가 던진 말입니다. 나름 열심히 살고 있는 아내로서 충분히 할 만한 발언입니다. '니도 함 읽어봐라. 공감할 걸!' 속으로 말했습니다. 아, 소심하여라. 열심히 헤엄쳐서 구조된 여자나 맥주나 마시면서 놀다가 구조된 남자나 결과는 똑같다. 노력이 아니라 노오력을 해도 안되는 세상이다. 그럼 어쩌라고? 노력하지 말라고? 저자는 노력이 우릴 배신하는 시츄에이션이 아주 많으니, 실망하지 말자고 한다. .. 2018. 11. 11.
76살에 붓을 든 화가 모지스 할머니 이야기 :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76살에 붓을 든 화가 모지스 할머니 이야기 :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미국의 어느 가난한 집 10남매 중 세째로 태어난 여인이 있습니다. 1860년이었습니다. 그녀는 12살부터 부유한 집 가정부로 일했습니다. 비록 가정부였지만 그녀의 삶은 즐거웠습니다. 27살에 남편을 만난 결혼을 하고 버지니아에서 농장 생활을 시작합니다. 남편과 함께 임대 농장에서 일하면서 버터를 만들고 감자 튀김을 만들어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이후 뉴욕의 이글 브리지에 정착을 하게 되고 틈틈히 자수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70대에 들어 관절염이 심해져 바늘에 실 꿰기가 어려워져서 더 이상 자수를 놓기 어려워지자 그녀는 붓을 듭니다. 76살에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80세에 개인전을 열었고, 88세에 '올해의 젊은 여성'으로 .. 2018. 9. 25.
영혼이 느껴지는 인간 데생 : 요네하라 마리 <프라하의 소녀시대> 영혼이 느껴지는 인간 데생 : 요네하라 마리 버스는 거의 급사면을 올라갔다. 버스가 다 올라간 곳에서 내려 야스나가 보라는 대로 눈을 돌린 나는 숨을 꿀꺽 삼켰다. 절경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사바 강과 도나우 강이 합해지면서 생긴 예각지가 무너져가는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성벽 건너편으로 구시가지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그 뒤로 기복 있는 풍경이 보인다. 더 멀리로는 한적한 농촌 지대가 펼쳐져 있다. "너무 아름다워. 터키군이 싸울 마음을 잃고 물러간 심정을 알 것 같아. 아마 저 기슭에서 짙은 안개에 잠긴 성벽을 보고 '하얀 도시!' 하고 외쳤을 거야." (p.300) 친구 야스나가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에게 보여준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풍경입니다. 칼레메그단 성으로 가자고 했던 마리에게 아무.. 2018. 9. 8.
엄니가 해주시던 맑은 조기탕이 생각나누나 : 박찬일 <미식가의 허기> 엄니가 해주시던 맑은 조기탕이 생각나누나 : 박찬일 한겨울 새벽에 장을 보면, 내가 먹는 밥도 아닌데 목이 멜 때가 있다. 막 짐을 부려놓고 추운 길가에서 식은 밥을 먹는 사람들이 보이는 까닭이다. 시장이란 본디 툭 터진 노상이라 바람 가릴 막조차 없게 마련이다. 배달받아서 먹는 그들의 밥상이 초라해 보이지는 않지만, 먹먹해지는 감정은 어쩔 수 없다. 그나마 배달이라도 받아 뜨신 밥을 드는 축은 낫다고 할까. 시장 노점에서 초라한 도시락밥을 꺼내어 국물도 없이 삼키는 할머니들을 보면, 아 이놈의 세상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p.244) 노가다라는 직업의 특성상 삼시세끼를 모두 밖에서 먹는다. 아침은 고봉민 김밥집에서 주는 아침 정식을 먹는다. 김치와 가지무침, 멸치볶음 같은 기본 반찬에 된장국이 나.. 2018. 6. 8.
좋은 글은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 :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좋은 글은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 : 황현산 할배의 뒤통수가 돋보이는 책 표지 그림이 유난히 시선을 붙잡는다. 캄캄한 어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얀 도화지에 할배는 무얼 그리 열심히 쓰고 계시나. 꽤 묵직한 느낌이 드는 이 그림은 독일 화가 팀 아이텔 그림이라고 한다. 할배의 모습이 너무 엄숙하고 단호해서 머 쓰고 계세요? 라고 물어볼 수도 없을 것 같다. 편집자는 어떻게 이 그림을 골랐을까. 왠지 이 책 제목 와 어울린다. 팀 아이텔 할배의 뒷모습이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의 다른 그림을 보니 다 뒤통수만 나온다. 팀 아이텔은 얼굴 정면을 그리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고. 그림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 2018. 5. 10.
아내에게 '자자, 이년아!' 라고 말해볼까? : 이수경 <차라리 혼자 살 걸 그랬어> 아내에게 '자자, 이년아!' 라고 말해볼까? : 이수경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때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고 확신할 때이다. - 빅토르 위고 (p.110) 아내와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 라고 느낀 건 나만 그런 걸까? 서울에서 일할 땐 그래도 매주 집에 내려갔었는데, 현장으로 근무지를 옮긴 후엔 한 달에 겨우 한 번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러면 더 애틋한 사이가 되어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 않다. 이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 같다. 전화로 하는 대화도 아이들 이야기 아니면 별 의미가 없는 일상의 사건들에 대한 보고 정도가 다다. 이번엔 무려 5주 만에 집에 갔더랬다. 맛나는 거도 많이 해 먹고 알콩달콩 재미있게 보내리란 맘으로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그런데 아주 오랜만에 만난 아내의 반.. 2018. 1. 6.
이제 35년 남았습니다 : 미치 앨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이제 35년 남았습니다 : 미치 앨봄 미치 앨봄은 인기가 많은 스포츠 칼럼니스트이자 방송 진행자입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명 인사입니다. 돈도 많이 벌고 이름도 날리게 되었지만 너무나 바쁜 일상으로 애인과의 사이도 멀어지고 오직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버렸죠. 그런 그도, 한 때 부자는 모두 나쁜 사람이며 와이셔츠와 넥타이는 죄수복이고, 오토바이를 몰고 바람을 맞으며 파리 뒷골목을 누비거나 티벳에 들어갈 자유가 없는 것은 행복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미치가 우연히 TV를 보다가 대학 시절에 자신이 잘 따랐던 모리 교수가 루게릭 병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 16년 만에 그는 교수를 찾아갑니다. 모리 교수는 마치 그저 긴 방학을 보내고 돌아온 것처.. 2017. 11. 16.